甑山法宗敎 六十年史-제2장 교단의 창업기-6
5) 오기초공사(오基礎公事) : 동곡(東谷)
(1) 성부님(聖父任)의 유서(遺書)와 오기초 입택(五基礎 入宅)
천기 77년(4280, 1947, 丁亥) 3월 3일, 기념치성을 봉행하니, 성부, 성모님께서 하명하시어 말씀하시되, “사월 초팔일에는 성전에 영상을 모시고 식을 거행토록 하라. 만일 그렇지 못하면은 너희들은 죽으리라.”고 하시었다. 이때부터 식구들은 주야를 계속하여 성전공사를 진행하여 4월 8일 오전 9시에 문을 미처 달지 못한 채 포장을 치고 화천하신 기념지에 명령대로 열석자의 성부님영상을 비롯한 제위 영상들의 봉안식(奉安式)을 거행하니, 식구들은 통곡소리 그칠 줄 몰랐으며, 선사님은 지금까지 겪은 도중 형제들의 너무나 심한 고초를 회상하며 단장의 애통을 금할 길 없어 엎드려 심고하기를, “아버님 신앙하는 사람들에게 소원성취 주옵소서.”하고 흐느껴 호소하였다.
이날 성부님의 생존 제자이신 김자현(金自賢)의 자제 김태진(金泰振), 김태준(金泰俊) 형제가 찾아와서 성상(聖像) 앞에 성부님의 유서(遺書)를 내놓고 잔을 올리고 통곡하였다. 유서의 내력을 물으니 김형렬(金亨烈)씨가 종제인 자현(自賢)에게 맡기면서 후일 부합되는 곳에 전하라 하였는데, 그 후 형렬님이 타개하시고 자현씨 또한 못 전하고 임종시에 태준, 태진 형제분에게 맡기시며, 후일 동곡에 불상을 모시는 곳이 있으면 그 곳에 전하라. 하시어 지금까지 부합되는 곳이 없어 간직하고 행여 전할 곳이 없을까 하여 부모님의 유교를 실행치 못하여 죄송한 마음 금할 수 없던 차, 이곳에 기지를 정하는 날부터 유심히 바라보고 오늘에야 전하니 마음이 가볍다며 또 슬픈 눈물을 흘리었다. 너무도 뜻밖의 일이라, 혹 자기 조작이 아닌가하여 여러 가지를 살펴본 즉, 그들이 하는 말이, “이 글은 조금도 우리의 조작이 아님을 원문에서 상고하시오. 추호라도 부합처가 아니면 내놓지 말라고 하셨노라.”고 하였다.
유서(遺書) 해설 (참고)
西天階塔行東洋 彌勒金佛同留連 湖南西神司命旗 指揮客望氏門 出世庚子奉天文 辛丑二七人道通 壬寅相逢金上人 布德於世盟誓約 忠孝烈倫世間無 四物藥材厥病癒
(서천계탑행동양 미륵금불동유련 호남서신사명기 지휘객망강씨문 출세경자봉천문 신축이칠인도통 임인상봉김상인 포덕어세맹서약 충효열륜세간무 사물약재궐병유)
서역 천계탑에서 동방으로 향하여 유력하다가, 금산사 미륵불에 응하여 머물다가, 호남에 서신사명의 기치를 세우고, 객망리 강씨 문중으로 옮겨 태어났다. 세상에 나서 경자년에 천문의 이치를 깨닫고, 신축년 7월 7일에 인도를 통했다(중통인의). 임인년에 수제자인 김형렬을 만나 큰 덕을 세상에 펼 것을 맹세하였다. 충성과 효도와 스승에 대한 절개라는 윤리가 세상에 없으나 그러한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사물약재이다.
銅谷仙化現佛像 遊魂更覓故園路 佛日出世禍福降 世間眼目今始開 有緣者皆聞知來 輔相顯明天地功 丹朱受命靑天雁 畵閣人其像籠鴻
(동곡선화현불상 유혼경각고원로 불일출세화복강 세간안목금시개 유연자개문지래 보상현명천지공 단주수명청천안 화각인기상롱홍)
전주 동곡에서 내가 죽으면 새로이 불상이 드러나리니, 떠돌던 유혼이 혼이 떠났던 옛 고향길을 되돌아온다. 부처의 기운이 세상에 드러날 때, 세상사람들의 안목이 비로소 열리게 된다. 인연 있는 자는 모두 듣고 스스로 알아서 찾아오니 서로 도와 천지의 공덕을 밝게 드러낸다. 단주가 명을 받으니 푸른 하늘에 기러기가 나는 듯 하고, 누각에 있는 사람의 큰 기러기의 상을 그린 것과 같다.(성인의 형체이다)
色擧用色 胡亥虛亡 夫政也者 柔蒲蘆也. 漢水濱含蘆飛行 飛鴻得意天空闊 燕自江南尋舊主 終是日新聖人德
(색거용색 호해허망 부 정야자 유포로야. 한수빈함노비행 비홍득의천공활 연자강남심구주 종시일신성인덕)
꾸며 화려한 것을 들어 썼던 호해(진나라 2세 군주)는 허망하다. 무릇 정치라는 것은 물가의 부드러운 갈대와 같은 것이다. 漢水 물가에는 갈대꽃이 흩날리고 기러기 날아 뜻을 얻으니 하늘이 공활하다. 강남에서 돌아온 제비는 옛 주인을 찾으니, 결국 이 모든 것은 날로 새로이 하려는 성인의 덕이다.
辛未生 辛丑年道通 壬戌生 壬寅年相逢. 古四月八日 釋迦佛誕生. 今四月八日 彌勒佛誕生. 己酉六月二十四日 抱含二十四節. 今四月八日應八卦. 是故 先天而天不違 後天而奉天時 時來天地皆同力. 佛之形體 仙之造化 儒之凡節. 都是 敎民化民. 好道遷佛 佛成人事
(신미생 신축년도통 임술생 임인년상봉. 고사월팔일 석가불탄생. 금사월팔일 미륵불탄생. 기유육월이십사일 포함이십사절. 금사월팔일응팔괘. 시고 선천이천불위 후천이봉천시 시래천지개동력. 불지형체 선지조화 유지범절. 도시 교민화민. 호도천불 불성인사).
신미생인 나는 신축년에 도통하고, 임술생인 김형렬을 임인년에 만났다. 옛 사월 팔일은 석가불의 탄생일이고, 지금 사월 팔일은 미륵불이 탄생하는 날이다. 기유년 6월 24일에 24절기가 모두 24수에 응하여 새롭게 태어나고, 4월 8일에 정역 팔괘 기운이 팔수에 응한다. 이런 까닭으로 선천에는 하늘이 그 도리를 차마 크게 어길 수가 없고, 후천의 때에는 천시를 받들게 되니 그 때가 오면 하늘과 땅이 모두 함께 힘을 다하게 된다. 불이 형체를 이루고 선이 조화를 나투고 유가 예의범절을 내세우는, 이 모든 것이 백성을 가르쳐 교화하기 위한 것이되 특히 좋은 도는 佛에 옮기니 佛이 인사를 성취케 할 것이다.
天以示乎人 人驗于天. 天道人道 一理通達. 日月火水木金土. 東西日月之道路故 東西分爲二京. 南火北水 南方三離火. 火云佛故 南則午 丙則南 丙午現佛像. 暗處明 莫如火. 佛道旺盛則 西金沈潛. 南無阿彌陀佛
(천이시호인 인험우천. 천도인도 일리통달. 일월화수목금토. 동서일월지도로고 동서분위이경. 남화북수 남방삼리화. 화운불고 남즉오 병즉남 병오현불상. 암처명 막여화. 불도왕성즉 서금침잠. 나무아미타불).
하늘이 이러한 것을 사람에게 보일 것이니 사람은 하늘에서 증험하게 된다. 하늘의 도와 사람의 도는 하나의 이치로 꿰뚫리는 것이니 일월과 수화금목토가 그 요체다. 동과 서는 일월이 다니는 큰길이므로 동과 서가 나뉘어서 각각 중심이 된다.남은 불이고 북은 물이니 남방에 (복희역의) 삼리화(대성인)이다.불기운이 들어 황극을 이루어야 한다. 불(火)이란 불(佛)을 의미하므로 남쪽은 十二支중에는 午방위요, 十干중에 丙이 남방위가 되니 丙午(태양 같은 사람,곧 부처를 말한다,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에서 불상이 드러난다. 어두운 곳에서 밝게 드러나는 것으로 불만한 것이 없으므로 佛道가 왕성하게되면 서쪽의 금기운은 침잠하게 된다. 나무아미타불이로다.
大學之道 在於明明德 在新民 在至於至善. 繼之者善 成之者性. 本末兼存 內外交養. 然後方可謂之大道也
(대학지도 재어명명덕 재신민 재지어지선. 계지자선 성지자성. 본말겸존 내외교양. 연후방가위지대도야)
대학의 큰 가르침은 밝은 덕을 밝히는 데에 있고, 백성들을 새롭게 하는데 있고, 지극한 선에 머무르는 데에 있다. 그러한 뜻을 있고자 하는 것이 선이요, 그러한 뜻을 성취하는 것은 하늘이 부여한 性이다. 처음과 말단을 겸하여 잘 보존하고, 안과 밖을 두루 기르고 난 연후에라야 가히 그러한 것을 일러 대도라 이를 것이다.
一年三百六十日 須待漸次進去. 便成一年 一千四百四十分以爲一日. 其一日 便成家家長世. 天地有無窮之福 天地有無窮之才. 天不失時故 以親切之神爲節目明知 主人矣
(일년삼백육십일 수대점차진거. 편성일년 일천사백사십분이위일일. 기일일 편성가가장세. 천지유무궁지복 천지유무궁지재. 천불실시고 이친절지신위절목명지 주인의)
일년이 360일이 되는 정역도수가 모름지기 때를 기다려 점차로 나아가 마침내 일년의 도수를 이룰 것이요, 1440분으로 하루를 삼게 될 것이다. (또한) 그 바른 하루가 곧 온 백성의 무궁한 세월을 이루게 된다. 천지에는 무궁한 복이 있고, 그에 합당하여 무궁한 재주를 지닌 사람이 있다. 하늘은 그 때를 놓치지 않으므로 그 주인으로 하여금 친절지신(신명)으로써 조목 조목 밝게 가르쳐줄 것이다.
小滿符 (소만부)
天屛 (천병)
정해(丁亥)년 4월초8일 병오(丙午)일에 동곡에서 순임에게 전하노라
(2) 무신(무신) 천지(천지) 대굿
천기 77년(4280, 1947, 丁亥) 9월 19일, 성부님 탄강 기념치성을 거행하니 성부님께옵서 하명하시기를, “너희들이 무당(巫堂)을 청하여 천지대굿을 하라. 우리나라는 단군시대로부터 무도가 시작되어 지금까지 유전하여 왔는데, 무도가 성할 때에는 인신(人神)이 합의롤 보아오다가 이조에 와서 유교정신이 나라 안에 팽배해짐에 따라 무당은 천인(賤人)으로 취급되어 그 뒤로 그 풍습이 답습되어 왔나니, 지금은 원시(原始)로 반본(反本)하는 때라, 남이야 욕을 하건 말건 도수를 돌려야 되나니. 그리 알고 오는 이십오일부터 굿을 하되, 무당과 기생을 열두명을 청하여 일주일간 계속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 때에 전번 개기치성(開基致誠)시에 써 올린 <敬告文>을 금자로 비단에 올려 무당과 기생으로 짝을 하여 춤을 추고 노래하게 한 다음 명령한대로 나의 왼어깨와 바른어깨에 걸도록 하라.”고 하시더라.
지시하신대로 근근히 제반 준비를 갖추어 정하신 날에 성전 앞에서 굿을 하게 되니, 천기(天機)도 기이하였다. 일주일간 무사히 행사를 진행하여 그 도수를 마쳤다.
(3) 동곡에 성부님 옥체 봉안(玉體奉安)
천기 77년(4280, 1947, 丁亥) 9월 19일, 성부님 탄강 기념치성에 성모님께서 하명하시되, “무자(戊子)년 2월 10일에 정읍 차교주(車敎主)의 집에 가 사실을 물어서 너의 아버님 체백(體魄)을 찾아서 모셔 오기에 힘써라.”고 하시었다. 선사, 정사를 비롯해 6명이 김제 경찰서에 가서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 정읍에 도착하였는데, 선사님과 본부 시봉 송선자(宋善子)는 차교주의 집으로 가서 하룻밤을 경과하면서 모든 동정을 살피기로 하고 정사는 박창욱(朴昌旭) 강수원(姜秀元) 오갑출(吳甲出)을 데리고 여관에 머물면서 그날 밤에 일제시대 보천교(普天敎)내에 파견되어 차씨 교중사를 전담하여 살핀 바 있던 전 고등계 형사 강부장을 찾아가 찾아온 연고를 말하고 협조를 구하니, 그는 실정을 토로하면서 옥체를 찾는 일은 중지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 실정인즉, 차월곡(車月谷)이 중도에 자기의 부친으로 신앙대상을 바꾸게 되면서 어느날 밤에 그의 동생인 차윤경(車潤京)과 그 밖에 두어사람을 불러 그때까지 비장해 두었던 성부의 옥체를 내어 놓으면서 너희들만 알고 산에 갖다 묻도록 하라고 하여 갖다 묻은 뒤, 일제에 의하여 교가 해산되어 십여성상이 지난 뒤에야 월곡의 셋째 아우가 옥체를 찾을 목적으로 그 자리에 과목을 심으면서 땅을 일일이 뒤지다시피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으며, 강부장 자신도 씨족관계도 있고 또한 옥체를 찾아 모신다면 각 교파간의 대우를 받을 것 같아서 청수(淸水)를 떠놓고 빌어가면서 3,4년 동안이나 두루 살펴보았으나 찾지 못하였은즉, 아무래도 그들이 평장한채 돌보지 않은 동안에 산사태가 나서 흩어져 버린 모양같으니 단념하고 돌아가는 것이 좋으리라는 것이었다. 정사는 다시 여관으로 돌아왔으나 잠은 오지 않고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앉았자니 비몽사몽간에 환상이 나타나는데, 지서 앞에 차월곡의 동생들이 있기에 쫓아가 뺨을 쳐올리고 서로 맞붙어 씨름을 하다보니, 월곡의 맏자부가 만류하면서 자기집으로 가자고 하기에 따라가 툇마루에 올라서서 발을 구르면서 호통을 하는데, 뒷산 산비탈에 두건을 쓴 젊은이가 나타나더니 뒷짐을 진채 삽을 끌고 내려와 정사 앞에 절을 하고, “너무 화를 내지 마세요. 체백만 모셔가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하더라. 이에 정사 소리를 질러, “이놈들아 어서 속히 모셔오라.”고 호령하니 그는 정사가 데리고 간 일꾼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어느 지점에 머물러 한참동안 삽질을 하니 김이 뭉개뭉개 나더라. 이윽고, 이윽고 삽위에다 마주들고 와서 푸른 보자기에 쌓인 둥그런 덩어리를 앞에 놓더라. 정사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분이 복받쳐, “이 죽일놈들 갖다가 버린다 하더래도 이 모양으로까지 할 수가 있느냐!”고 호령하니 두건을 쓴 젊은이는, “여보시오, 내가 할 책임은 다 하였으니 나중에 잊지말고 나를 찾아나 주시오.”하면서 슬프게 흥얼거리며 건들건들 뒷산으로 올라가더라. 깜짝 놀라 눈을 뜨니 꿈이라, 뜰에 나가 대흥리 앞산을 살펴보니 그 자리가 눈앞에 선하게 보이는 듯 하였다.
날이 새어 아침에 차씨집 근처로 나가니 선사님은 송선자와 같이 나오시는데 상황을 물은즉, 차씨 부인은 “우리는 전혀 모르는 일이다.”고 하며 그 말만 되풀이하므로, 밤을 그대로 새우고 왔노라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이에 월곡의 동생인 윤경노인의 집을 방문하여 찾아온 사유를 말하고 만일 순순히 말을 듣지 않는다면 법적인 수속을 할 수 밖에 없노라고 하였더니, 그는 잔뜩 겁을 내어 놀라면서, “진정하시오. 혈식께서 오셔서 아버님을 부르고 애통해할 때 상제님께서 대답이 없으실 이치가 있을 수 없은 즉, 한 십여일간만 기한을 준다면 그동안 산천에 기도는 늘 해왔지만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축원한다면 밤에 현몽이라도 계실 듯 하니 그렇게 해주시오.”하며 애걸하기로, 한달을 한하고 찾아보도록 당부하고 칠백환을 주고 비용에 보태어 쓰도록 한 다음 동곡으로 돌아왔다. 성전에 진지상을 올린 선사, 정사는 다음과 같이 상고하였다.
「바람을 스치고 비를 스치는 물결과 같이 세월의 흐름속에 우리 두 사람의 천신만고는 실로 붓으로 쓰기에는 힘드옵나이다. 그러나 세상 모양은 가소롭고 가탄하기만 하오니 성부님 옥체는 어느 곳에 계시온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골절이 쑤셔오는데 성부님을 신앙한다는 몰지각자가 많아, 혹은 도취구복(盜取求福)을 일삼고 혹은 증산의 재생이라 자칭하며 감언이설로 혹세무민을 일삼아 그 행악(行惡)은 이루 헤아릴 수 없으니, 생각컨대 천인공노에 절치부심(切齒腐心)이로소이다. 연이나 성부님을 숭상하여 장래 복을 구하는자 혹은 성부님의 재림을 고대하는자 수백만을 헤아리건마는 핏줄을 받은 몸으로서 아직도 성부님 옥체를 찾아모시지 못한 채 어디엔지 알길도 없는 풀 덤불속에 버려둔 채로 있사오니, 어찌 차마 하룻밤인들 발을 뻗고 잠들 수 있사오리까? 언제나 옥체를 찾아 모시어 명산대천에 터를 잡아 안장(安葬)하여 일편단심(一片丹心) 사무쳐 지새운 그동안의 사적을 성부님의 홍대무량(弘大無量)하신 성업을 기념하기 위해 세울 삼청루각(三淸樓閣) 한 곳에 기록하고 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사온즉, 성부님께옵서 명백히 계시하시와 저희의 원을 풀게 하시옵고 또한 성부님을 지극히 믿사옵기에 저희와 더불어 고초를 겪은 형제들의 원을 풀으사 그들의 괴로움을 풀어주시기를 빌고 비옵나이다. 저희로서 취할바 명백한 명령를 내리시옵소서.」
이월이십사일에, 정읍으로부터 윤경노인의 부인 주판례가 찾아와서, 진심으로 발원하여 거듭 기도를 올린 결과 그 당시의 평장터를 찾을 수 있었으니 안심하라고 하면서 이십칠일에 가만히 모시고 올 터이니 마중을 나와달라고 부탁하고 나서, 만일 대흥리 교중이나 차씨 일문에서 알게되면 큰 분쟁이 일어나게 될 것이므로 아무도 모르게 모셔와야 될 것이며, 자기네 내외는 그곳에서 살 수 없으니, 이사할 거처나 주선해 달라고 부탁하고 돌아갔다. 2월 27일, 정읍으로 마중을 나가 성부님의 옥체를 모시고 오는데 풍우(風雨)가 대작하였다.
동곡 성전에 옥체를 모시니 성부님께서 명령하시되, “무자(戊子)년 3월 3일에 봉안식(奉安式)을 행하라.”고 하시기에 성전 후편에 묘각을 짓고 또 도적이 들지도 모를 일이어서 네명씩 번을 짜서 지키었다. 천기 78년(4281, 1948, 戊子) 3월 3일, 성부님께서 옥체 봉안식을 거행하니, 그동안 선사는 혈식으로서 옥체를 찾아 모시고자 했던 일편단심에 오늘을 맞게 되니 서럽고도 기쁜마음에 복받치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4) 사례주연(謝禮酒宴)
천기 78년(4281, 1948, 戊子) 3월 3일, 성부님께서 옥체 봉안 치성시에 하강하시어 말씀하시되, “너희들이 금성산에서 사년동안 일을 봄으로써 천지신명들이 강림하도록 하였으므로 모든 일이 무위이화로 되어온 것이니라. 겉으로는 너희가 하되, 안으로는 천지신명이 꾸미는 일이다. 5월 5일에 금성산에 가서 정자집 주인은 물론 이씨네 문중의 노소를 초정하여 주연을 베풀고 그 곳에 있게 되었던 사유를 낱낱이 말하고 증거를 드러내 놓도록 하라.”고 하심으로 그곳에 사는 임무순(任武順)의 집에서 많은 사람을 초청하여 주연을 베풀고 그곳에서 있었던 사실들을 공표하니 모두들 감탄하였다.
(5) 사해용왕(四海龍王) 치성(致誠)
천기 78년(4281, 1948, 戊子) 6월 24일 화천기념 치성에 성부님께서 하명하시되, “칠월 칠석에 부산(釜山)에 가서 사해용왕 치성을 올리되, 무당 한사람을 데리고가서 공사를 보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경주 도생 수십명을 동참토록하여 토성동에거주하던 진채봉(陣菜奉)의 집에 장소를 택하여 공사를 보니, 풍우대작하며 해중에서 기적소리가 몇 번이고 울리어 왔다.
(6) 금강산(金剛山) 치성
하루는 천명이 내리되, “무자(戊子)년 9월 19일 치성은 금강산(金剛山)에 가서 보도록 하라.”고 하시어 삼팔선이 가로 막혀 불가능함을 상고하니, “금강산이 건너다 보이는 태백산(太白山) 만경대(萬景臺)에 가서 보라.”고 하셨다.
명을 받들어 봉화지방대표 최상헌(崔相憲)에게 치성 준비를 지시하니 그 곳 도생들과 합심하여 제반 준비를 진행하였다. 본부에서 치성 수일전에 태백산을 향해 출발하는데, 성부님께서 천상의 모든 신명들을 대동하시고 친히 동행하시니, 지나는 곳곳마다 우리 도생 형제들이 있고 없나를 물어보시고 형제들이 사는 곳에는 일일이 길을 안내받아 심방하시고 형제들의 시위를 받으시었다. 천기 78년(4281, 1948, 戊子) 9월 19일, 태백산 산상의 신선바위(神仙岩)에서 닷새동안 계속 공사를 봉행하였다. 그때에, 아래 조그마한 산막촌에 사는 한 노인이 올라와서 하는 말이, 삼년 전에 동제(洞祭)를 올린 일이 있는데 그때에 태백산령(太白山靈)이 나타나서 나는 지금 딴곳으로 가고 이곳에는 금강산령(金剛山靈)이 올것이니 축원문을 고치도록 하라고 하여 그대로 행한 바 있다고 말하니, 일동은 진정 이상한 노릇이라고 감탄하고 이곳까지 친히 동행하신 성부와 천지신명들에게 감사하여 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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