甑山法宗敎 六十年史-제2장 교단의 창업기-1
1. 화은당 선사(華恩堂 禪師)
1) 화은당 선사의 탄생
증산법종교의 창교주(創敎主)이신 화은당 선사는 증산 선생님의 오직 하나뿐인 혈식(血息)으로서, 천기 34년(4237, 1904, 甲辰) 정월 15일 자정에 아버지 증산 상제님과 어머니 하동정씨(河東鄭氏)사이에서 현 전라북도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에서 탄생하시었다. 성은 진주강씨(晋州姜氏)이고, 이름은 순임(舜任)이며, 도호는 화은당(華恩堂)이시다.
하루는 정씨 성모(聖母)께서 꿈을 꾸는데, 하늘로부터 아름다운 풍악소리가 들려오더니 그 소리를 타고 많은 선관들이 하강하는 중에 한 선녀가 품에 안기어 춤을 추었다. 이로부터 정씨 성모께서 잉태하시어 열달이 되자 자정에 해산을 하셨다.
그의 출생시, 할머니는 산모의 첫국밥을 지으려고 밖에 나가셨는데, 많은 신명들이 기치창검을 들고 온 집안을 둘러싸고 있는 중에, 난데없는 지동소리가 들려오는지라, 혼겁을 하고 방안으로 쫓겨 들어가 몇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나가 첫국밥을 지으셨다.
성부께서는 화은당 위로 이남이녀를 두셨는데, 하나같이 용모가 비범하여 조부께서는 무한한 애정을 두셨으나, 성부께서는 웬일인지 집에 오시면 그 아이들은 눈앞에 서지도 못하게 하시고 조부님께 말씀하시기를, “저 아이들은 모두 칠, 팔세가 되면 죽을 것이니 정을 두지 마시옵소서.”라고 당부하셨는데, 그 후 사남매는 모두 말씀대로, 칠 팔세에 죽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 정씨 성모는 또 출산하게 되었으나, 여식일 뿐 아니라 이 아이도 단명하여 죽으리라 생각하니 기가 막히고 애통하여 아이를 거둘 생각도 없이 정신을 잃고 누워있었다.
오후가 되어 성부께서 집에 오시어 아이를 보시니 하룻밤 반나절을 방구석에 밀쳐 놓은 채 그대로 있었는지라, 아이는 푸른 독기가 서리어 곧 절명할 지경인 것을 아시고 성부께서 크게 슬퍼하시면서 앞집 사는 안칠용을 불러 돼지를 잡아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버리고 가져오게 하신 후, 아이를 강보에 써서 그 속에 하룻밤을 넣어두시니, 갓난이에게 서리었던 독기가 빠지고 소생하였다. 성부께서는, “이 아이라야 정차 나의 일을 이어 빛내게 되리니 잘 기르라.”고 성모님을 타이르시고 삼칠일 후에 다시 오겠다고 하시며 동곡으로 떠나시었다.
그 후, 삼칠일 하루 전에 집에 오시어 안칠용으로 하여금 백미(白米) 서말(三斗)과 백지 세권을 준비시키시고, 그날 밤에 마당에 멍석을 펴고 청수 한 동이를 떠 놓으시고는 집안 사람들에게는 밖을 내다보지 못하게 하신 다음, 백미 서말을 사방에 쥐어 던지시며 주송을 하셨는데, 이튿날 아침에 식구들이 밖에 나와 살펴보니 사방에 쌀 한톨이 없는 것이었다.
삼칠일날, 무당을 불러 굿을 시작하시는데 갓난아이를 무당 앞에 뉘여 놓고 백지와 부적과 글쓴 종이를 갓난이 사타구니에 붙이시고 담뱃대로 고저장단을 짚듯이 하시며, “자지가 나온다. 자지가 나온다.”고 소리를 하시니, 무당이 굿을 하다가 성부의 하시는 거동을 보고 내심, 광인이 아니고는 여자아이에게 저러한 말을 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속으로 욕을 하면서 굿을 건성으로 하는지라, 성부께서 무당의 속마음을 아시고 ‘죽일년이라 어이 가식으로 굿을 하는고’하며 책망하시니 무당이 웃는지라, 재차 꾸짖어 가로되, “벼락을 맞아 죽어 쌀 년이라.”하시니 별안간 뇌성이 대발하는지라, 무당이 그 자리에서 졸도를 하였다. 다시 호통하시니, 무당의 정신이 돌아와 일어나서 절하고 “알지 못하여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이제부터 진심으로 하겠사오니 살려주시옵소서.”하고 용서를 빈 다음 성심으로 굿을 계속하여 사흘만에 마치니, 성부께서 갓난아이의 사타구니에 붙였던 것을 떼어 지니시고, “회문산(回文山)을 거쳐 모악산(母岳山)에 가겠노라.”하시며 집을 떠나셨다.
2) 화은당 선사의 유소시대(幼少時代)
당시, 성부께서는 천지공사를 주재하시느라 객망리 본가에는 일년에 두, 서너차례 밖에 내왕이 없으셨다. 성부께서는 박사공 창서의 23대손이 되시며, 통계공 회중의 십사대 종손으로서 집안에는 각종 문물이 많이 전하여 내려왔는데, 하루는 관직에 대한 교지며 족보 기타 문집 등 일체의 서책을 마당에 꺼내어 교지에 찍힌 직인 자리만 오려 떼시고 전부 불사르시니, 수십호 문중 노소가 모여들어 소동이 일어났으나, 만류치 못한 채 소실되고 말았다. 그 뒤로 집안의 모든 사람과 척이 되어 오면서 이윽고는 문중 재산까지 다 없애고 하시는 말씀이, “유도(儒道)의 구습을 없애고 새 세상을 건설해야 할지니, 유도에서는 범절(凡節)밖에 취할 것이 없노라.”고 하시니라.
화은당의 나이 육세 되던 해인 천기 39년(4242, 1909, 己酉) 5월에 성부께서 집에 오시어 오랫동안 그리우신 조부님전에 배례하시고, “소자의 불효지대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부모님의 은대덕중하심이 태산도 오히려 가벼우며, 부모님을 양어깨에 업고 높고 높은 수미산을 넘어가도 부모님의 은혜를 다 갚지 못할 터인데도 불구하고, 이 불효소자는 불고선령 불고부모 불고가사 하오니, 어찌 사람의 도리라 하오리까” 하시며 엎드려 눈물을 흘리시니, 조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상고이래로 위천하자는 불고가사라.”하시며 “우왕의 9년 치수에도 삼과불입문(三過不入門)하였던 것이니, 증산의 마음이 부족함이 아니라 가사를 돌아볼 여가가 없었던 것이지.”하시며, “이 아비는 증산의 대도성취를 불철주야로 기도하고 있는바이다.”하시며 희비의 눈물을 흘리시었다.
그 다음날부터 성부께서는 여식을 안고 못내 못내 사랑하시더니 여식을 데리고 시루봉 선영 산소에 가서 배례시키시고, “이 묘는 너의 증조부의 묘소이다.”, “이 묘는 너의 고조부의 묘소이다.”라고 일일이 가르쳐주시며 어린 여식의 손을 잡고 좌우산천의 좋은 경개를 구경시키시고 그 지방을 주유하시며 수십호 되는 친척을 일일이 다 찾아뵈었는데, 누구 한 사람 반겨 맞는 사람 없고 문중 노인들은 집안을 망쳐놓은 증산이라 욕하고, 안노인들은 잘난 사남매는 다 죽이고 저 못난 계집아이를 데리고 와서 자랑한다고 비소가 자자하였다.
그러나, 자애로우신 성부께서는 그러한 욕설에도 괘념치 않으시고, “나에게 만약, 동생이나 아들이 있으면 인간에 대죄만 지을 뿐 아니라 천지의 대적(大賊)이 되므로 이 못난 여식이라야 앞으로 증산의 후계사를 여의성취하리라.”하시니 모두 비웃으며 더 더욱 광인으로 여기었다.
삼일간을 머물러 계신 후 나흘만에 부모님전에 만단사례 하시며, “이제 떠나면 언제 올지 모르오니 몸을 안보하시오며, 어린 순임을 잘 길러 장래사를 후계토록 하십시오.”라고 말씀드리고, 정씨 성모를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이 여식은 아들 대신이니, 비록 풍우상설지중이라도 잘 기르시오. 증산의 일맥이 이뿐이라. 만약, 이 아이를 박대하면 증산을 영영 저버리는 것이라.”하시면서 여식을 안고 못내 못내 하시면서 길을 떠나시었다.
몇 달 후 소식을 들으니, 본가를 떠나신 그 길로 금구에 있는 외가 친척들을 일일이 방문하시고 동곡 약방으로 돌아가시어 6월 24일 화천하시었다고 하였다.
그 당시, 성부께서 화천하셨다는 소식을 조부님께서는 통보받으셨으나, 모녀에게는 정상이 너무 가련하다 하시어 알리지 않으시고, 조부님은 정신을 수습치 못하시고 한달여 동안 여광여취로 다니시다가 돌아오시어 비로소 그 사실을 모녀에게 이야기하니, 모녀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접하고 부둥켜 안고 애통해마지 않았다. 여식을 안고 못내 못내 떠나시던 길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이별의 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니, 모녀의 깊은 서러움은 말로 형언키 어려웠다.
성부께서 화천하신 뒤로 가세는 더욱 궁핍하여 생계가 곤궁막심하니 관흥하신 어머니는 방아품을 팔거나 유리걸식하시며 따님을 기르시기에 온갖 정성을 다하시고, 노쇠하신 할아버지는 짚신을 삼아가며 아드님의 크나큰 이상을 생각하고 그의 재림을 기원하며 사시로 치성을 올리시고 축원하는 그 모습은 실로 필설로는 형언키 어려웠다.
이 무렵 화은당의 나이 팔세시, 전라도 순천에 사는 장기동 종반이 찾아와서 가장집물을 사주어 가난하고 막막한 살림살이를 도와주고 외로운 처지를 위로해주니, 그 은혜 실로 골수에 아로새겨져 잊지 못할 바였다.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의지하여 근근이 지내더니 세월은 흘러 선사 나이 열세살이 되었을 때, 그 동안 하늘같이 믿고 의지하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다. 선사모녀를 옆에 불러 앉히시고 유언하시기를, “집안에서 양자(養子)말이 나오거든 부디 거절하고 이 손녀에게 남복상의(男服喪衣)를 입혀 상여 뒤에 따르게 하라. 이는 증산의 부탁이며 나도 또한 부탁하니 이 손녀로 후계토록 할 것임을 부디 잊지 말라.”하시며 어린 선사의 손을 붙잡고 못내 못내 하시더니 드디어 별세하시고 말았으니, 정씨성모 어린 순임을 안고 애통망극 하였으나, 그 누구 하나 위로하는 사람 없었다. 겨우 정신을 수습하여 조부를 장사지냈다.
조부가 별세하시고 나자, 선사모녀를 없앰으로서 자기가 성부님의 후계사를 맡아 할 수 있다는 그릇된 공명심과 욕심에 눈이 어두워진 고모는 선사모녀를 없애기 위해 갖은 흉모를 꾀한 나머지 모녀를 모함하고 문중과 동리사람들을 선동하여 모녀를 핍박하였다. 마침내는 양모(楊某)라는 자의 어미와 모의하여 어느날 밤, 난봉꾼을 동원하여 선사모녀를 집안에서 축출하고 말았으니, 성모께서는 홀로 이곳 저곳을 떠돌며 유리걸식하시면서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방황하였고, 선사는 정읍에 사는 어느 노파의 집에 끌려가서 모녀간에 생이별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었다.
정읍 양가(楊哥)의 집에 억류된 채, 부친의 후계사를 생각하고 또 모친과의 상봉을 기원하며 주야로 앙청도축하시니, 그 정성이 하늘에 감동되었음인지 선사 열네살 되던 해 8월 15일에 원평 일우에서 모녀가 상봉하여 서로 붙들고 통곡하였다. 이는 성부를 신앙하는 조철제씨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 후 다시 모녀가 삼년간 헤어졌다가 선사 나이 십칠세에 만나 구 태인읍에서 칠년간을 함께 지내며 성부님의 후계사를 논의하던 중, 정씨 대모님께서 선사 나이 25세 되시던 무진년 2월부터 우연히 득병하시어 신음하시니, 백방으로 간병하였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그해 어느 날 하루는 성모께서 선사를 부르시어 하시는 말씀이, “아가야 들어라. 내가 이제는 천상으로 가야한다. 천상에 가서 너의 아버지를 만나 장래사를 보이지 않게 도울 것이다. 8월 15일은 일년 중에서도 가장 좋은 명절날이라, 내가 가더라도 네가 성의만 있으면 집집이 다니면서 음식을 얻어 가지고라도 나의 제사는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시었다. 이와 같이 장래지사를 여러 가지 말씀하신 후, “너는 이곳에서 비가 지나가고 바람이 지난 후에 만수추풍이 불어와서 부모유업을 성사할 것이니 부디 부디 조심, 조심하여 나아가라.”고 하시었다.
천기58년(4261, 1928, 戊辰)8월 15일 아침에 정씨성모는 새 옷을 갈아입으시고, “내가 아침에 죽으면 동리사람들이 각기 명절을 지내느라고 오지 못할 것이니, 오늘 정오에 가기로 하노라,”하시더니 정오가 되자, 오색채운이 영롱하게 집을 덮고 방안이 캄캄하여지면서 이름 모를 향기가 가득하더니 홀연 선화하시었다. 선사는 성모님 체백을 안고 통곡하다가 혼도하였는데, 정신을 수습하여 보니 동리 사람들이 모여들어 선사를 위로하였다. 태인 공동묘지에 장례를 치르고 서러움과 외로움을 구천(九天)에 하소연하여 말씀하시기를, “오호 서럽고 서럽도다. 관후하신 우리 모친 천상으로 가셨으면 우리 부친 상봉하여 극락향수 누리련만 불과 연세 55세, 만고풍진 다 겪으며 기구한 생애 생각하니 골절이 아리도다. 이몸의 중한 임무 그 누구와 상의하며 어느 곳에 의지하여 이 한스러움을 호소하리.”하시니 천지간에 외로이 남으신 선사의 정경을 생각하면 실로 피맺혀 오는 애수를 어찌 끊을 수가 있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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