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은당실기-제2장 일기초공사 전주 노송동
제2장 일기초공사 전주 노송동
1.부모의 후계사를 이룩하고 져 상의할 대상자를 찾아 홀로 팔도강산을 순라 하였건만,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시지 못한 채 기진맥진한 상태에 빠져버리신 선사께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바가 없어 이세상의 모든 일을 잊어버리고 부모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다고 죽음을 결심하게 되셨던 바, 그는 죽을 자리를 택하여 이리의 목천포 갯가 갈대밭을 찾게 되시었더니라.
인적마저 없이 고요하기만 한 강가에 달빛은 한껏 휘영찬데 간간히 부는 바람은 갈대밭을 스치면서 단장의 애수를 자아내게 하고, 철석거리는 물소리는 요란하여 영원한 길을 찾아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애를 모으는 가슴속은 실로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선사는 얼과 넋을 모두 천지신명과 부모님 영전에 최후의 기도를 올리게 되었다.
그때에 하늘로부터는 큰 소리로 꾸짖어 쓰러질 듯한 선사의 마음을 경책하시는 성부의 말씀이 들려왔으니 가로되 “나의 혈식아 어찌하여 생명을 자처 코 져 하느냐. 너를 위하여 한 군자를 데려왔으니 정신을 차려 마음을 가다듬고 이 사람과 동심하여 앞으로 다가올 모든 일을 의논하라” 하시는지라. 두세 차례나 계속하여 꾸짖으시며 명령하시는 그 말씀은 몽매간에도 잊지 못하던 아버님 말씀이 분명한지라 선사님은 두 손을 쳐들어 얼싸안으려 발버둥치는데, 성부의 영상은 가신 곳이 없고 낯모르는 한 사람이 옆에 앉아 간절히 위로하며 곡절을 묻는지라. 선사께서 가로되 “이 몸은 천지간에 살아 쓸데없는 사람이니 나의 사정을 물을 필요도 없고, 또한 나의 사정을 호소할 수 없으니 묻지 마르소서”라고 한마디로 거절 하시더라. 이에 곁에 앉은 사람은 다시 위로하여 가로되 “나도 또한 영남사람으로 가슴에 사무치는 큰 뜻이 있어 사방을 두루 순력하기 십여 년간인데 어젯밤에 꿈을 꾸었는데 약차약차하기로 이곳에 내도하였더니, 과연 꿈속에서 본 보와 같이 부인의 이와 같은 정상을 대하게 되니 이것이 모두 우연한 일이 아닐 뿐더러 더욱이 지금 부인은 목숨이 경각을 다투는 비참한 형편에 있으니 어떠한 곡절이 있는지 알 바 없으나 무엇보다도 생명이 지중하오니 부디 회심하시와 신명을 안보 하소서”하고 수차 간곡하게 위로하더라.
이에 선사는 혼미 중에 겨우 정신을 수습하여 생각하니 조금 전 질책하시던 성부의 말씀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게 되어 이것이 바로 새 기틀을 보여 주시는 하늘의 뜻인가 싶어 죄송하기 짝이 없는 몸을 일으켜 그에게 의탁할 것을 결심하시고, 그와 더불어 전주로 돌아오시니 이날 밤에 선사를 위로한 이가 곧 법종교의 정사 구암 김병철이었다.
2.전주로 돌아오신 선사는 지금까지의 내력을 묻는 정사에게 전후사정을 일일이 통정하시고 “무의무탁한 가운데 부모의 후계사를 이룩하고자 모진 액을 다졌다고 하나 우밀 여자 나이라 해도 삼십 이세면 반평생인데 여지 껏 부모의 후계사를 이룰 아무런 기초도 잡지 못하였으므로 차라리 목숨을 끊고 져 하였더니, 마침 천우신조로 당신의 구원을 받아 경각에 처한 생명을 보존하게 되었으니 깊은 인연일 것이며, 또한 당신의 몽조의 지시와 나를 경책하시며 “너를 위하여 한 군자를 데려 왔으니 모든 것을 그에게 의탁하라” 하시던 부친의 말씀을 생각할 때, 이에 천상에서 정해주신 천연이라 아니할 수 없으므로 부친의 후계사를 이루고 못 이룸은 오직 그대에게 있아오니 측량 하소서” 하시는지라 정사 또한 그 마음을 털어 고하니 “나 역시 천리원정 영남사람으로서 경북 청송 산악지대에 출생하여 인언서판이 부족하고 세간에 출입할 자격도 되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가정에서는 대학을 마칠 학비까지 예산을 세워 놓았는데도 불구하고 열일곱 살 되던 해에 고향을 떠나 향리 사람들에게 행적을 감춘 채 사방을 두루 돌면서 생각하니, 대학을 졸업하자면 연령이 이미 삼십 세가 될 것이요 또한, 졸업을 한댓자 일제의 식민정책에 노복에 불과한 생활을 하던 가 불연이면 불온한 사상가가 되는 길밖에 없을 것이며, 그러 저리 하다가 나이가 들면 머리에 흰 머리가 덮어 덧없이 죽어갈 것이 뻔한지라. 그와 같이 허무하게 세상을 보내기보다는 좀더 보람 있는 일을 하며 세상에 왔다 간 표를 남기고 보리라는 굳은 결심 밑에 부모의 명을 어기고 불효막심키는 하나 소시로부터 품어온 한 뜻을 이루기 전에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리라 하여 동서남북으로 홀홀히 떠돌아다니는 중에 그래도 신명의 도우심인가 가는 곳마다 은인을 만나 의식에는 과히 곤고함을 느껴보지 않은 채 십여년을 경과하였으니, 그 동안 금전에 눈을 떴으면 가히 부명을 얻을만한 기회도 있었던 것으로 일전에도 충남에 거주하는 한 여인이 큰 재산을 소지한바 나와 동거하자는 간청이 있었으나 뜻이 다른 나인지라 한마디로 거절하니 여인은 그래도 단념하지 않고 수차의 교섭을 거듭해 오는지라 부득이 그를 피하여 호남으로 내려오는 길에 이리에 있는 여관에서 한 꿈을 얻은 끝에 뜻밖에 부인을 만나게 되어 이런 처지가 되고 말았으니, 대전에서 여우를 피해오다가 이곳에서 범을 만난 격이라 해야 되겠소” 하며 서로 뜻을 주고받아 허락한바 되었으니, 그때는 바로 정축년 구월 십칠일이니라.
3.서로 지나치는 노상에서 한잔 술을 나누게 되는 것도 전생의 인연이 없이는 될 수 없는 일인데 십여년의 세월을 두고 동서남북으로 헤매는 끝에 뜻을 이루지 못하여 죽음을 각오하게 된 그 자리에서 서로 만나 회심케 된다는 것은 보통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한 정사는 다음날 집을 구하고 수종들 사람까지 정하여 선사께서 거처하실 곳을 만들어 드리니라.
이에 감격한 선사는 십여년간 푼푼이 모은 돈 보따리를 내어 놓으면서 하시는 말씀이 “부친의 체백은 신앙자로 하여금 이리저리 분산적란을 당하였으니 뼈골이나 찾아 안장해야 되겠으며, 또한 조부모 산소가 아직도 공동묘지에 계시니 공동묘지나 면하게 하여야만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일념으로 십여년을 주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몸만 병들었으니 이제는 죽을 수밖에 없다 하고 죽음터를 찾았다가 부친의 경책하심과 명령하심을 입어 당신을 만나게 되었으니, 부친의 후계사에 관한 성불성이 오직 그대에게 달렸아온 즉 깊이 양찰 하옵소서 천지도 음양배합의 이치로 우주만물을 화육하심과 같이 인간도 또한 그러하여 독음독양으로는 도저히 대사를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거듭 십여성상에 걸쳐 주류하면서 심각하게 느낀 바이오니 부친께옵서 명령 하옵시는 바에 따라 이 몸의 배필이 되어 주시옵고 유업을 추진하여 기어코 성공해야 되겠나이다.”
위와 같은 말씀을 들을 때 당돌한 생각이 없지 않았으나 정사 역시 십여년간을 뜻을 두고 세상을 주류하면서 증산천사에 관한 말씀을 들은바 있었으며, 그의 심오한 도법에 깊은 감명을 받은 바도 있던 터에 더구나 오직 부모를 위하여 혈심에 불타는 선사의 지극효성에 감동되어 선사의 청을 응낙하고, 선사께서 내어놓으신 돈 보따리를 펴보니 십전짜리 오십전짜리 일원짜리를 모아 십여년을 차고 다니었는데 헤아려보니 팔백여원이더라. 선사는 이밖에 별도로 일천여원을 내어 놓으시니 일금 이천여원인데, 이것으로 기금을 삼아 앞으로 십년을 작정하여 체백을 찾아 미실 준비를 하자고 하시더니, 또 선사에게 양말 끌어매는 기술이 있은 즉 그것으로 생활방침을 세울 수 있다고도 하시더라.
4.위와 같이 하여 부부의 의를 맺은 뒤에 지성으로 조석 진지상을 받들어 모시게 되니 이것이 바로 일기초가 된다. 몇 개월이 못 되어서 정사는 병석에 눕게 되었으니 십여성상에 걸친 마음의 긴장을 풀어 그러했는지, 또는 십생구사의 곤경을 극복하고 나온 여독이 들어났음인지, 병상에 누운 채 인사를 깨닫지 못하는 상태로 수개월을 경과하면서 백약이 무효하여 사경에 이르렀는데, 하루는 뜻밖에 천지가 혼암터니 혼미 중에 성부께서 약을 가지고 내려 오사 먹기를 명하심으로 받아 마셨더니 경각에 정신이 청명해지고 일신이 말쑥하게 쾌유되는지라 난생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영험에 기쁨이 솟아올라 신앙심도 깊어지고 선사와 더불어 장래사를 논의하면서 밤낮으로 열렬한 기도를 거듭 올리게 되었더니라. 이와 같이 우리들의 신앙기대가 잡힘에 따라 성부의 명령과 지시는 조석으로 그 도를 더하시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시국은 시시각각으로 급변하여 중일전쟁은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고 제이차 세계대전도 한고비를 넘는 판이어서 일본의 위정자들은 국내에서 예수교도를 비롯한 모든 종교신자들로 하여금 저들의 신사에 참배하게 하는 등 가진 탄압이 여간 아니었을 뿐 아니라, 더구나 증산교 신앙단체를 준 민족운동단체로 규정한 그들은 소위 치안유지법을 적용시켜 많은 신앙동지들을 투옥하는 판국이어서 그러한 공포분위기 속에서 성부의 명령을 받든다는 것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지마는, 만일 몽조지시대로 봉행치 아니하면 생사를 판단하는 무서운 체험을 몇 번이고 겪어왔던 터이라 죽음을 각오하고 성부의 명령을 봉행하였다.
그러던 중 정축년 십일월 어느 날 밤에 공중에서 “나의 복동아”하고 부르시기에 밖에 나가 허공을 향하여 사배를 드리니 큰 불덩어리 모양으로 생긴 한 광명체를 내려주시는데, 선사께서 치마에다 받아 방안에 들어가니 온 방안이 서기가 서리는지라 밤마다 기도를 올리고 심고를 하시더라.
그 뒤 어느 날 밤에 “남고산성 관운묘에 가서 치성을 드리고 한숨을 자면 알게 되는 일이 있으리라”고 하시는 말씀이 계심에 이튿날 관운묘를 찾아가 기도를 올리고 한숨을 잤더니 몽중에 운장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모든 일에 겁을 내지 말고 수행하라 나는 중국 사람으로서 조선을 도우려 하노니 집에 돌아가서 지성으로 기도하라”함에 돌아와서 지성으로 기도 하니라.
5.이와 같이 거듭되는 기도와 치성으로 말미암아 몸이 편할 사이가 없는데 정사는 각 지방에 친우들과 더불어 여러 가지 경영한 일도 많은 터에 도저히 몸을 빼쳐나갈 수 없을뿐더러 한편 선사께서 하시는 일이 의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분의 인물은 아무리 보아도 추녀이고 의복차림이며 음식범절이며 또 언어 동정이 비남비녀의 행동으로만 보이는데 비록 계시가 있다 할지라도 점쟁이의 유에 불과한 것같이 생각되어 급기야는 증산천사의 따님이 아닌가보다 하는 생각에까지 나서 하루는 여러 가지로 고민하던 끝에 선사와 헤어져 멀리 떠나려고 마음을 먹게 되었더라.
이에 정사의 마음을 짐작하게 된 선사는 이튿날 아침에 웃으시면서 “당신이 딴마음을 먹지마는 그렇게는 안 될 것이니 마음을 돌리시오” 하시는지라 정사 기왕에 말이 난 김에 여러 가지로 따져 마음의 의심을 풀어야 되리라 생각하고 “내가 당신을 대할 때에 의심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다른 것은 다 그만둔다 하더라도 왕대밭에 왕대 난다는 말이 있는데 증산천사는 그야말로 후천 하느님으로서 천지를 개조하실 어른이신데 당신은 옛날 마귀할미보다도 더 못났으니 그래 가지고 어찌 선생님의 따님이라 할 수 있겠소 아무래도 의심스럽소”라고 캐어물었더니, 이에 선사께서는 한숨을 지으시면서 “그럴법한 노릇이요 그러나 그런 의심은 곧 풀을 수가 있는 것이니 염려 마시오 내가 구태인읍에 사는 몇 사람 이름을 부를 테니 기록하시오, 그리고 내 사진을 드릴 테니 이 길로 그곳에 가서 사람들을 찾아 사진을 보이시고 내가 누군가를 알아보시면 곧 해명이 될 것이오, 그 사람들은 어머님 영위를 삼년 동안 시봉했고 또 재세 시에 수년을 신봉한 일이 있으니 사진을 보면 바로 말을 할 것이요”하시는지라.
정사는 그의 말을 쫓아 사진을 지니고 태인에 가서 몇 사람을 찾아 인사하고 사진을 제시하니 그들은 모두 놀래고 낙루하면서 “이 아씨는 우리 애기씨인데 지금 어디 계시 온지요” 하는지라. 정사는 비로소 의심을 풀고 집으로 돌아와서 결과를 얘기하고 사과하니 선사는 웃으시면서 얼굴은 비록 못났을지라도 딸이사 진정 친딸이라고 하시면서 “못난이래야 나의 뒤를 이으리라.” 하셨다는 성부의 말씀을 들어 어렸을 때 얘기를 하시는 것이었으니 그 내막은 제일 장에 기록된 바와 같으니라.
또 “내가 만일 인물이 특출하였던들 벌써 어느 구구에게 끌려갔을는지 모를 일이나 병들고 박색한 탓으로 지금껏 홀로 있다가 이렇게 당신과 만나게 된 줄이나 알라”고 농담처럼 말씀하시기도 하더라.
6.무인년 정월 십오일 선사의 탄일치성을 올리고 나니 그날 밤에 천상으로부터 학 두 마리가 내려와 방안 현판에 앉더니 일주일동안 눈에 완연하게 보이며 나래를 펄럭거리고 소리를 치고 하는데 하루는 공중으로부터 천명이 내리기를 “이 뒤로 어느 때에 가면 태몽이 되어 천상동자가 포태될 것이니 주의하라” 하시니라.
또 그 해 삼월 삼일날 밤에 성부께서 나타나시어 선사에게 말씀하시기를 “모악산 대원사에 가면 내가 공부할 때에 수종하던 박금곡이라는 주지가 있을 것이니 찾아가 말하기를 영남서 왔다 하고 인사를 하면 반가이 맞이할 것이요, 또한 그러고 보면 알게 되는 일이 있을 터이니 그리 알고 일간에 발정하라” 하심으로 수일 후에 행장을 수습하여 대원사에 박주주를 방문한 즉 깜짝 놀라 반기면서 “선생님을 뫼 신 것과 다름없나이다.” 고 감개무량해 하더라. 이곳에 사흘간을 머물면서 여러 가지 재세 시에 말씀을 듣고 또한 비전하는 경문도 받아와서 그 후 여러 가지 행사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 뒤 정읍 차 교주가 자기 집에 와서 있으라 한데도 응하지 않고 수다한 사람이 찾아와서 여러 가지 질문을 받았으나 통정할만한 사정이 되지 못한 채 밤마다 현현묘묘한 명령을 봉행하는 공사를 거듭하면서 기묘년 시월까지 경과하게 되었으니, 그동안의 모든 일이 무위이화로 이루어지니라.
7.경진년 유월 육일 밤 성부께서 천지신명을 거느리시고 오시어서 선사내외를 데리시고 고부(현 정읍군 고부면) 시루봉에 가서 정사의 몸을 전부 해부하며 소제탁기 하신 다음 새 사람을 만들어 쓰리라 하시며 떠나기 전에 표적을 하여 두리라 하시고, 성부의 한 손가락을 들어 정사의 손바닥 한가운데를 찍으시고 또한 아랫입술에 찍으시더니 자리를 떠나시면서 오후 다섯 시경에 정신이 돌아오거늘 미음을 준비하여 두었다가 마시고 일주일 동안 출입을 금하라 이 뒤에 큰 식념이 생길 터이니 그때에 득체하리라” 하시더라
성부께서 떠나신 후 오시경에 일어나니 전신에서 선선한 기분이 나고 두 손바닥에 붉은 구슬이 솟아있었으며 아래위 입술에도 붉은 팥알만한 구슬이 솟았더라. 선화할 때가지도 그 자욱이 남아 있었다.
8.기묘년 십일월 동지치성을 올리고 나니 천상으로부터 학을 타고 동자가 내려와서 선사 배속으로 들어가더니 경지년을 지내자 차차 윤신하여 가다가 칠팔월이 되니 몸이 만삭이라 구월십삼일 밤에 천상의 의원내와와 산파와 유모가 내려와서 해산케 되었는데 동자는 유모가 품에 안고 천상으로 올라간 뒤 산실에는 이상한 향기가 진동하더라.
산모는 이주일 동안을 산실에 누워 있는데 밤마다 천상으로부터 유모가 동자를 데리고 내려와서 젖을 먹이고 하였는데 그 동안 동자의 성장함이 실로 기적적 이이서 말로는 이루 형언할 도리가 없노라.
신사년 정월에 또 태몽을 얻어 포태한바 십 삭이 되자 신사 시월 십일 밤 거년에 난 형동자가 내려와서 말하기를 “지상의 젖을 먹으니 정신이 희미하여 못쓰겠으니 동생은 지상의 젖을 먹이지 않고 천상의 약으로 키우겠다”고 하면서 그냥 데리고 왔다가 되돌아 올라가서 선사의 젖이 불어서 아픔으로 짜서 버리기가 수년이라.
1.부모의 후계사를 이룩하고 져 상의할 대상자를 찾아 홀로 팔도강산을 순라 하였건만,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시지 못한 채 기진맥진한 상태에 빠져버리신 선사께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바가 없어 이세상의 모든 일을 잊어버리고 부모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다고 죽음을 결심하게 되셨던 바, 그는 죽을 자리를 택하여 이리의 목천포 갯가 갈대밭을 찾게 되시었더니라.
인적마저 없이 고요하기만 한 강가에 달빛은 한껏 휘영찬데 간간히 부는 바람은 갈대밭을 스치면서 단장의 애수를 자아내게 하고, 철석거리는 물소리는 요란하여 영원한 길을 찾아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애를 모으는 가슴속은 실로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선사는 얼과 넋을 모두 천지신명과 부모님 영전에 최후의 기도를 올리게 되었다.
그때에 하늘로부터는 큰 소리로 꾸짖어 쓰러질 듯한 선사의 마음을 경책하시는 성부의 말씀이 들려왔으니 가로되 “나의 혈식아 어찌하여 생명을 자처 코 져 하느냐. 너를 위하여 한 군자를 데려왔으니 정신을 차려 마음을 가다듬고 이 사람과 동심하여 앞으로 다가올 모든 일을 의논하라” 하시는지라. 두세 차례나 계속하여 꾸짖으시며 명령하시는 그 말씀은 몽매간에도 잊지 못하던 아버님 말씀이 분명한지라 선사님은 두 손을 쳐들어 얼싸안으려 발버둥치는데, 성부의 영상은 가신 곳이 없고 낯모르는 한 사람이 옆에 앉아 간절히 위로하며 곡절을 묻는지라. 선사께서 가로되 “이 몸은 천지간에 살아 쓸데없는 사람이니 나의 사정을 물을 필요도 없고, 또한 나의 사정을 호소할 수 없으니 묻지 마르소서”라고 한마디로 거절 하시더라. 이에 곁에 앉은 사람은 다시 위로하여 가로되 “나도 또한 영남사람으로 가슴에 사무치는 큰 뜻이 있어 사방을 두루 순력하기 십여 년간인데 어젯밤에 꿈을 꾸었는데 약차약차하기로 이곳에 내도하였더니, 과연 꿈속에서 본 보와 같이 부인의 이와 같은 정상을 대하게 되니 이것이 모두 우연한 일이 아닐 뿐더러 더욱이 지금 부인은 목숨이 경각을 다투는 비참한 형편에 있으니 어떠한 곡절이 있는지 알 바 없으나 무엇보다도 생명이 지중하오니 부디 회심하시와 신명을 안보 하소서”하고 수차 간곡하게 위로하더라.
이에 선사는 혼미 중에 겨우 정신을 수습하여 생각하니 조금 전 질책하시던 성부의 말씀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게 되어 이것이 바로 새 기틀을 보여 주시는 하늘의 뜻인가 싶어 죄송하기 짝이 없는 몸을 일으켜 그에게 의탁할 것을 결심하시고, 그와 더불어 전주로 돌아오시니 이날 밤에 선사를 위로한 이가 곧 법종교의 정사 구암 김병철이었다.
2.전주로 돌아오신 선사는 지금까지의 내력을 묻는 정사에게 전후사정을 일일이 통정하시고 “무의무탁한 가운데 부모의 후계사를 이룩하고자 모진 액을 다졌다고 하나 우밀 여자 나이라 해도 삼십 이세면 반평생인데 여지 껏 부모의 후계사를 이룰 아무런 기초도 잡지 못하였으므로 차라리 목숨을 끊고 져 하였더니, 마침 천우신조로 당신의 구원을 받아 경각에 처한 생명을 보존하게 되었으니 깊은 인연일 것이며, 또한 당신의 몽조의 지시와 나를 경책하시며 “너를 위하여 한 군자를 데려 왔으니 모든 것을 그에게 의탁하라” 하시던 부친의 말씀을 생각할 때, 이에 천상에서 정해주신 천연이라 아니할 수 없으므로 부친의 후계사를 이루고 못 이룸은 오직 그대에게 있아오니 측량 하소서” 하시는지라 정사 또한 그 마음을 털어 고하니 “나 역시 천리원정 영남사람으로서 경북 청송 산악지대에 출생하여 인언서판이 부족하고 세간에 출입할 자격도 되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가정에서는 대학을 마칠 학비까지 예산을 세워 놓았는데도 불구하고 열일곱 살 되던 해에 고향을 떠나 향리 사람들에게 행적을 감춘 채 사방을 두루 돌면서 생각하니, 대학을 졸업하자면 연령이 이미 삼십 세가 될 것이요 또한, 졸업을 한댓자 일제의 식민정책에 노복에 불과한 생활을 하던 가 불연이면 불온한 사상가가 되는 길밖에 없을 것이며, 그러 저리 하다가 나이가 들면 머리에 흰 머리가 덮어 덧없이 죽어갈 것이 뻔한지라. 그와 같이 허무하게 세상을 보내기보다는 좀더 보람 있는 일을 하며 세상에 왔다 간 표를 남기고 보리라는 굳은 결심 밑에 부모의 명을 어기고 불효막심키는 하나 소시로부터 품어온 한 뜻을 이루기 전에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리라 하여 동서남북으로 홀홀히 떠돌아다니는 중에 그래도 신명의 도우심인가 가는 곳마다 은인을 만나 의식에는 과히 곤고함을 느껴보지 않은 채 십여년을 경과하였으니, 그 동안 금전에 눈을 떴으면 가히 부명을 얻을만한 기회도 있었던 것으로 일전에도 충남에 거주하는 한 여인이 큰 재산을 소지한바 나와 동거하자는 간청이 있었으나 뜻이 다른 나인지라 한마디로 거절하니 여인은 그래도 단념하지 않고 수차의 교섭을 거듭해 오는지라 부득이 그를 피하여 호남으로 내려오는 길에 이리에 있는 여관에서 한 꿈을 얻은 끝에 뜻밖에 부인을 만나게 되어 이런 처지가 되고 말았으니, 대전에서 여우를 피해오다가 이곳에서 범을 만난 격이라 해야 되겠소” 하며 서로 뜻을 주고받아 허락한바 되었으니, 그때는 바로 정축년 구월 십칠일이니라.
3.서로 지나치는 노상에서 한잔 술을 나누게 되는 것도 전생의 인연이 없이는 될 수 없는 일인데 십여년의 세월을 두고 동서남북으로 헤매는 끝에 뜻을 이루지 못하여 죽음을 각오하게 된 그 자리에서 서로 만나 회심케 된다는 것은 보통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한 정사는 다음날 집을 구하고 수종들 사람까지 정하여 선사께서 거처하실 곳을 만들어 드리니라.
이에 감격한 선사는 십여년간 푼푼이 모은 돈 보따리를 내어 놓으면서 하시는 말씀이 “부친의 체백은 신앙자로 하여금 이리저리 분산적란을 당하였으니 뼈골이나 찾아 안장해야 되겠으며, 또한 조부모 산소가 아직도 공동묘지에 계시니 공동묘지나 면하게 하여야만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일념으로 십여년을 주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몸만 병들었으니 이제는 죽을 수밖에 없다 하고 죽음터를 찾았다가 부친의 경책하심과 명령하심을 입어 당신을 만나게 되었으니, 부친의 후계사에 관한 성불성이 오직 그대에게 달렸아온 즉 깊이 양찰 하옵소서 천지도 음양배합의 이치로 우주만물을 화육하심과 같이 인간도 또한 그러하여 독음독양으로는 도저히 대사를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거듭 십여성상에 걸쳐 주류하면서 심각하게 느낀 바이오니 부친께옵서 명령 하옵시는 바에 따라 이 몸의 배필이 되어 주시옵고 유업을 추진하여 기어코 성공해야 되겠나이다.”
위와 같은 말씀을 들을 때 당돌한 생각이 없지 않았으나 정사 역시 십여년간을 뜻을 두고 세상을 주류하면서 증산천사에 관한 말씀을 들은바 있었으며, 그의 심오한 도법에 깊은 감명을 받은 바도 있던 터에 더구나 오직 부모를 위하여 혈심에 불타는 선사의 지극효성에 감동되어 선사의 청을 응낙하고, 선사께서 내어놓으신 돈 보따리를 펴보니 십전짜리 오십전짜리 일원짜리를 모아 십여년을 차고 다니었는데 헤아려보니 팔백여원이더라. 선사는 이밖에 별도로 일천여원을 내어 놓으시니 일금 이천여원인데, 이것으로 기금을 삼아 앞으로 십년을 작정하여 체백을 찾아 미실 준비를 하자고 하시더니, 또 선사에게 양말 끌어매는 기술이 있은 즉 그것으로 생활방침을 세울 수 있다고도 하시더라.
4.위와 같이 하여 부부의 의를 맺은 뒤에 지성으로 조석 진지상을 받들어 모시게 되니 이것이 바로 일기초가 된다. 몇 개월이 못 되어서 정사는 병석에 눕게 되었으니 십여성상에 걸친 마음의 긴장을 풀어 그러했는지, 또는 십생구사의 곤경을 극복하고 나온 여독이 들어났음인지, 병상에 누운 채 인사를 깨닫지 못하는 상태로 수개월을 경과하면서 백약이 무효하여 사경에 이르렀는데, 하루는 뜻밖에 천지가 혼암터니 혼미 중에 성부께서 약을 가지고 내려 오사 먹기를 명하심으로 받아 마셨더니 경각에 정신이 청명해지고 일신이 말쑥하게 쾌유되는지라 난생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영험에 기쁨이 솟아올라 신앙심도 깊어지고 선사와 더불어 장래사를 논의하면서 밤낮으로 열렬한 기도를 거듭 올리게 되었더니라. 이와 같이 우리들의 신앙기대가 잡힘에 따라 성부의 명령과 지시는 조석으로 그 도를 더하시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시국은 시시각각으로 급변하여 중일전쟁은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고 제이차 세계대전도 한고비를 넘는 판이어서 일본의 위정자들은 국내에서 예수교도를 비롯한 모든 종교신자들로 하여금 저들의 신사에 참배하게 하는 등 가진 탄압이 여간 아니었을 뿐 아니라, 더구나 증산교 신앙단체를 준 민족운동단체로 규정한 그들은 소위 치안유지법을 적용시켜 많은 신앙동지들을 투옥하는 판국이어서 그러한 공포분위기 속에서 성부의 명령을 받든다는 것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지마는, 만일 몽조지시대로 봉행치 아니하면 생사를 판단하는 무서운 체험을 몇 번이고 겪어왔던 터이라 죽음을 각오하고 성부의 명령을 봉행하였다.
그러던 중 정축년 십일월 어느 날 밤에 공중에서 “나의 복동아”하고 부르시기에 밖에 나가 허공을 향하여 사배를 드리니 큰 불덩어리 모양으로 생긴 한 광명체를 내려주시는데, 선사께서 치마에다 받아 방안에 들어가니 온 방안이 서기가 서리는지라 밤마다 기도를 올리고 심고를 하시더라.
그 뒤 어느 날 밤에 “남고산성 관운묘에 가서 치성을 드리고 한숨을 자면 알게 되는 일이 있으리라”고 하시는 말씀이 계심에 이튿날 관운묘를 찾아가 기도를 올리고 한숨을 잤더니 몽중에 운장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모든 일에 겁을 내지 말고 수행하라 나는 중국 사람으로서 조선을 도우려 하노니 집에 돌아가서 지성으로 기도하라”함에 돌아와서 지성으로 기도 하니라.
5.이와 같이 거듭되는 기도와 치성으로 말미암아 몸이 편할 사이가 없는데 정사는 각 지방에 친우들과 더불어 여러 가지 경영한 일도 많은 터에 도저히 몸을 빼쳐나갈 수 없을뿐더러 한편 선사께서 하시는 일이 의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분의 인물은 아무리 보아도 추녀이고 의복차림이며 음식범절이며 또 언어 동정이 비남비녀의 행동으로만 보이는데 비록 계시가 있다 할지라도 점쟁이의 유에 불과한 것같이 생각되어 급기야는 증산천사의 따님이 아닌가보다 하는 생각에까지 나서 하루는 여러 가지로 고민하던 끝에 선사와 헤어져 멀리 떠나려고 마음을 먹게 되었더라.
이에 정사의 마음을 짐작하게 된 선사는 이튿날 아침에 웃으시면서 “당신이 딴마음을 먹지마는 그렇게는 안 될 것이니 마음을 돌리시오” 하시는지라 정사 기왕에 말이 난 김에 여러 가지로 따져 마음의 의심을 풀어야 되리라 생각하고 “내가 당신을 대할 때에 의심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다른 것은 다 그만둔다 하더라도 왕대밭에 왕대 난다는 말이 있는데 증산천사는 그야말로 후천 하느님으로서 천지를 개조하실 어른이신데 당신은 옛날 마귀할미보다도 더 못났으니 그래 가지고 어찌 선생님의 따님이라 할 수 있겠소 아무래도 의심스럽소”라고 캐어물었더니, 이에 선사께서는 한숨을 지으시면서 “그럴법한 노릇이요 그러나 그런 의심은 곧 풀을 수가 있는 것이니 염려 마시오 내가 구태인읍에 사는 몇 사람 이름을 부를 테니 기록하시오, 그리고 내 사진을 드릴 테니 이 길로 그곳에 가서 사람들을 찾아 사진을 보이시고 내가 누군가를 알아보시면 곧 해명이 될 것이오, 그 사람들은 어머님 영위를 삼년 동안 시봉했고 또 재세 시에 수년을 신봉한 일이 있으니 사진을 보면 바로 말을 할 것이요”하시는지라.
정사는 그의 말을 쫓아 사진을 지니고 태인에 가서 몇 사람을 찾아 인사하고 사진을 제시하니 그들은 모두 놀래고 낙루하면서 “이 아씨는 우리 애기씨인데 지금 어디 계시 온지요” 하는지라. 정사는 비로소 의심을 풀고 집으로 돌아와서 결과를 얘기하고 사과하니 선사는 웃으시면서 얼굴은 비록 못났을지라도 딸이사 진정 친딸이라고 하시면서 “못난이래야 나의 뒤를 이으리라.” 하셨다는 성부의 말씀을 들어 어렸을 때 얘기를 하시는 것이었으니 그 내막은 제일 장에 기록된 바와 같으니라.
또 “내가 만일 인물이 특출하였던들 벌써 어느 구구에게 끌려갔을는지 모를 일이나 병들고 박색한 탓으로 지금껏 홀로 있다가 이렇게 당신과 만나게 된 줄이나 알라”고 농담처럼 말씀하시기도 하더라.
6.무인년 정월 십오일 선사의 탄일치성을 올리고 나니 그날 밤에 천상으로부터 학 두 마리가 내려와 방안 현판에 앉더니 일주일동안 눈에 완연하게 보이며 나래를 펄럭거리고 소리를 치고 하는데 하루는 공중으로부터 천명이 내리기를 “이 뒤로 어느 때에 가면 태몽이 되어 천상동자가 포태될 것이니 주의하라” 하시니라.
또 그 해 삼월 삼일날 밤에 성부께서 나타나시어 선사에게 말씀하시기를 “모악산 대원사에 가면 내가 공부할 때에 수종하던 박금곡이라는 주지가 있을 것이니 찾아가 말하기를 영남서 왔다 하고 인사를 하면 반가이 맞이할 것이요, 또한 그러고 보면 알게 되는 일이 있을 터이니 그리 알고 일간에 발정하라” 하심으로 수일 후에 행장을 수습하여 대원사에 박주주를 방문한 즉 깜짝 놀라 반기면서 “선생님을 뫼 신 것과 다름없나이다.” 고 감개무량해 하더라. 이곳에 사흘간을 머물면서 여러 가지 재세 시에 말씀을 듣고 또한 비전하는 경문도 받아와서 그 후 여러 가지 행사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 뒤 정읍 차 교주가 자기 집에 와서 있으라 한데도 응하지 않고 수다한 사람이 찾아와서 여러 가지 질문을 받았으나 통정할만한 사정이 되지 못한 채 밤마다 현현묘묘한 명령을 봉행하는 공사를 거듭하면서 기묘년 시월까지 경과하게 되었으니, 그동안의 모든 일이 무위이화로 이루어지니라.
7.경진년 유월 육일 밤 성부께서 천지신명을 거느리시고 오시어서 선사내외를 데리시고 고부(현 정읍군 고부면) 시루봉에 가서 정사의 몸을 전부 해부하며 소제탁기 하신 다음 새 사람을 만들어 쓰리라 하시며 떠나기 전에 표적을 하여 두리라 하시고, 성부의 한 손가락을 들어 정사의 손바닥 한가운데를 찍으시고 또한 아랫입술에 찍으시더니 자리를 떠나시면서 오후 다섯 시경에 정신이 돌아오거늘 미음을 준비하여 두었다가 마시고 일주일 동안 출입을 금하라 이 뒤에 큰 식념이 생길 터이니 그때에 득체하리라” 하시더라
성부께서 떠나신 후 오시경에 일어나니 전신에서 선선한 기분이 나고 두 손바닥에 붉은 구슬이 솟아있었으며 아래위 입술에도 붉은 팥알만한 구슬이 솟았더라. 선화할 때가지도 그 자욱이 남아 있었다.
8.기묘년 십일월 동지치성을 올리고 나니 천상으로부터 학을 타고 동자가 내려와서 선사 배속으로 들어가더니 경지년을 지내자 차차 윤신하여 가다가 칠팔월이 되니 몸이 만삭이라 구월십삼일 밤에 천상의 의원내와와 산파와 유모가 내려와서 해산케 되었는데 동자는 유모가 품에 안고 천상으로 올라간 뒤 산실에는 이상한 향기가 진동하더라.
산모는 이주일 동안을 산실에 누워 있는데 밤마다 천상으로부터 유모가 동자를 데리고 내려와서 젖을 먹이고 하였는데 그 동안 동자의 성장함이 실로 기적적 이이서 말로는 이루 형언할 도리가 없노라.
신사년 정월에 또 태몽을 얻어 포태한바 십 삭이 되자 신사 시월 십일 밤 거년에 난 형동자가 내려와서 말하기를 “지상의 젖을 먹으니 정신이 희미하여 못쓰겠으니 동생은 지상의 젖을 먹이지 않고 천상의 약으로 키우겠다”고 하면서 그냥 데리고 왔다가 되돌아 올라가서 선사의 젖이 불어서 아픔으로 짜서 버리기가 수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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