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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夷九曲(무이구곡)

武夷九曲(무이구곡)

기타 자료실  전자방 전자방님의 글모음 쪽지 2013-11-16 22:25 9,309
武夷九曲

 序詩

武夷山中有仙靈  武夷山 가운데 仙靈이 있으니
山下寒流曲曲淸  山 아래 寒流는 굽이굽이 맑도다.
欲識箇中奇絶處  箇中의 奇絶處를 알고자 한다면
櫂歌閑聽兩三聲  櫂歌 兩三聲을 한가로이 들어보소.

朱文公의 九曲은 純全히 이것이 한 줄기 道로 나아가는 次序이다.
그 立意는 진실로 苟且하지 않으며, 다만 武夷山水를 위한 것뿐이 아니다. 第一首는 道의 全體를 말한 것이니, 澈上澈下, 無內無外하고, 흩어진 萬物萬事가 根源이 없는 것이 없으니, 그 妙處는 膏粱의 맛이나, 金玉의 貴한 것보다도 좋은 것이라, 사람이 發明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이르기를, “箇中의 奇絶處를 알고자 한다면 櫂歌 兩三聲을 한가로이 들어보소.” 라고 한 것이다.

 其一
一曲溪邊上釣船  一曲이라, 시냇가에서 낚싯배에 오르니
幔亭峰影醮晴川  幔亭峰 그림자는 晴川으로 시집오네.
虹橋一斷無消息  虹橋가 한 번 끊어지니 消息이 없는데
萬壑千嚴鎖暮烟  萬壑·千嚴은 暮烟 속에 닫혀 있네.

이 首는 孔孟이 떠난 뒤에 道統이 오래 끊긴 것을 말한다. 그 사이에 無窮無盡한 妙味기 있다. 首章에서 所謂 奇絶處라고 한 것은, 모두가 氣質이 物慾에 가려지고 더구나 異端邪說에 가로막혀 沈溺한 것이 굳으니, 진실로 探索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를 본 者는 낚싯배에 오른 자이니, 向學의 뜻이 발을 붙인 것이다. 幔亭峰 그림자는, 또한 그것을 처음으로 보고서 하는 말이다. 본 것이 없으면 또한 向學할 수 없다. 또한 道統의 전함이 없다는 것을 몰라도 배우겠다는 뜻이 있으면, 곧 이것은 이미 正道를 본 것이다. 論語에서 말하는 ‘可與共學者’이다.

 其二
二曲亭亭玉女峰  二曲은 亭亭한 玉女峰이라
揷花臨水爲誰容  꽂은 꽃이 물에 臨하니 누구의 얼굴인가?
道人不復荒臺夢  道人은 다시 荒臺를 꿈꾸지 않으며
興入前山翠重    興이 나서 들어가니 앞산의 푸른빛은 몇 겹인가?

이 首는 배우는 길이 먼빛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능히 이 마음을 屛絶한 然後에야, 능히 勇氣를 내어 入道한다. 만약 이 마음을 능히 勇猛하게 制去하지 못하면 그 志氣가, 마침내 昏惰하게 되어, 한 치를 나아가면 한 자를 退步한다. “앞산의 푸른빛은 몇 겹인가?” 리고 한 것은 바로 一曲에서 말한 ‘萬壑千嚴’을 말한다. ‘興入前山’은, 바로 그 志氣가 淸明한 것이다. 그러므로 능히 勇決奮發하여 반드시 깊이 들어가서 끝까지 가보려는 것이다. 小畜卦 初爻辭는 純全히 이 뜻이다. 卦는 一陰으로 四羣陽에 居之하는 뜻이니 모두 그것을 蓄止하게 되니, 또한 玉女가 感人하는 것과 같다. 初九는 卦의 처음에 居之하여, 더불어 相應하여 그 뜻이 옮겨지나, 剛함으로써 乾健의 體에 居하니, 능히 遠絶擺脫을 反復하며, 正道도 들어가 行한다. 그러므로 ‘復自道何其咎’ 라고 하였다. 復은 必還이며, 自는 由이며, 發初에 立脚한 뜻이다. 道는, 乾道이니, 처음에 네 가지 느끼는 바(喜怒哀樂)가 되어, 곧 그 잘못을 알고, 反復하여 正道를 거쳐서 行하니, 勇健이 아니면 不能한 것이다. 처음에 느끼는 바가 되었기 때문에 허물이 있고, 이미 능히 멀리 가지 않아서 돌아왔으니 허물이라고 하는 것이 모두 없어진다. ‘何其咎’란, “어찌 허물이 있겠는가?” 라고 말하는 것이다. 程子가 이르기를, ‘無咎之甚明也’ 라고 하였느데, 그 勇氣를 칭찬한 말이며, 순전히 이는 이 詩意에서 由來한 것이다.

 其三
三曲君看架壑船  三曲에서 그대는 架壑船을 보리니
不知停棹幾何年  모르노라, 櫓젓기 멈춘 지 몇몇 해 되었는지.
桑田海水今如許  桑田과 海水가 지금 이와 같으니
泡沫風燈堪自憐,  泡沫과 風燈은 스스로 可憐하다 하리로다.

이 曲(굽이)은, 이미 능히 遠色하고, 또 世間의 一切의 榮辱·得失에 當하여, 모두 능히 洗除蕩滌하여, 그 가슴속에 끼어들지 못하게 한 然後에, 俗累를 모두 뚫고 沛然하게 入道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오직 血肉을 가진 몸에 拘碍를 받기 때문에, 榮辱·得失로 心身이 묶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佛家의 泡沫·風燈之說은 비록 正理는 아니지만, 도한 사람의 利慾之心을 씻어낼 만하기 때문에, 文公께서 이를 借用하신 것이다.

 其四
五曲東西兩石巖  넷째 굽이 東西에는 두 石巖이니
巖花垂露碧남毿  巖花에 이슬 내리고 푸르기가 남毿(남산)하다.
金溪叫罷無人見  金鷄는 울기를 그쳤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고
月滿空山水滿潭  달은 공산에 가득하고 물은 沼潭에 가득하도다.

이 曲은 駸駸(침침)하게 얻은 것이 있고, 또 色을 멀리하고 俗累를 屛絶하였기 때문에, 능히 前進하여 여기에 이른 것이다. 東西 兩石巖은, 높은 곳을 우러러보며 단단한 것을 뚫어 深切함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巖花垂露는 好意思요, 鼎來不足悅乎아”의 心境이 아닌가? ‘金溪叫罷無人見’은, 마치 높은 곳에 서 있는 것과 같아서 비록 따르고자 하나 그 방법이 없는 것이다.

*남毿(남산)=털이나 풀 같은 것이 길게 늘어진 모습.
 금계(金鷄)=天上에 사는 닭, 또는 美稱.

 其五

五曲山高雲氣深  五曲은 山이 높고 구름이 깊은 곳이니
長時煙雨暗平林  오래도록 안개비에 平林이 어둡도다.
林間有客無人識  숲 사이 나그네 있어도 아는 사람 없으니
欵乃聲中萬古心  소리 가운데, 萬古의 마음을 사랑하도다.

이 曲은, 깊이 들어가서, 몸이 그 땅에 이르면 홀로 自得하게 되고, 萬古 聖賢의 心事를 알게 된다. 그러나 아직 雲氣와 烟雨가 있으니, 아직도 暗暗明明한 사이에 있으니, 아직 능히 貫徹明了하지 못하나, 思慮省察을 수고롭게 하지 않아도, 豁然하지 않음이 없는 境地이다. 上蔡先生이 程子를 뵈니, 程子께서 그 近日의 所得을 물으셨다. 대답하기를, “天下에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하여 程子가 말씀하시기를, “어질도다. 도리어 發得함이 너무 이르다.”고 하셨다. 대개 理致는 진실로 이와 같다. 그러나 豁然大通에 으르지 못하여 아직도 明暗 사이에 있으면서 오히려 省察이 必要한데, 만약 갑자기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라고 말한다면, 도리어 이것을 잃게 될 것이다.

 其六

六曲蒼屛繞碧灣  六曲은 蒼屛이라 碧灣이 감아 돌아
茅茨終日掩柴關  茅茨는 終日토록 柴關이 닫혔도다.
客來倚槕巖花落  객이 와서 노에 의지하니 巖花는 떨어지고
猿鳥不驚春意閑  猿鳥는 놀라지 않으면 春意가 한가롭도다.

여기에 이르면 능히 安靜이 되어 天地萬物이, 그 本體를 나타내며 智巧와 私欲의 虛實이 도망치지 못하며, 生意가 流行하여, 가는 곳마다 充滿하니, 天地가 자리 잡을 수 있고 萬物을 기를 수 있다. 目前이 모두 和順의 境地이니 아직 배우지 못한 사람이 능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其七

七曲移船上碧灘  七曲은 배를 옮겨 碧灘으로 오르니
隱屛仙掌更回看  隱屛과 仙掌을 回看하도다.
却憐昨夜峰頭雨  도리어 지난밤의 峰頭雨가 可憐하니
添得飛泉幾度寒  飛泉을 添得하여 몇 번이나 추웠던가?

 이 曲은, 下學을 거쳐서 上達하는 것이니, 비록 上達하였어도 下學에서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隱屛仙掌更回看 却憐昨夜峰頭雨 添得飛泉幾度寒” 이라고 한 것은 ‘溫故知新’이다. 妙用이 無窮하여, 源源하게 내려온다. 大全에 依據할 것 같으면, 本源을 찾는 것은, 그 뜻은 마땅히 道의 體用이라고 하겠으며, 원래 空虛한 것이 아니라, 可悅可樂하여, 또한 窮盡함이 없는데, 배우지 못한 자는 몰라서 迃遠無味라고 하며, 힘쓰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集本에는, 뒤 二句를, “人言此處無佳境, 只有石堂空翠寒” 이라고 하였다. 石堂은 山名이다.

 其八

八曲風煙勢欲開  八曲의 風烟은 氣勢가 열리려고 하니
鼓樓巖下水濚回  鼓樓巖 아래로는 물이 빙글빙글 濚回하도다.
莫言此處無佳景  이곳에 좋은 경치 없다고 말하지 마시오.
自是遊人不上來  여기부터 遊人은 올라오지도 못하니.

이 曲은, 이미 豁然貫通할 곳에 가까우나, 또한 下學에서 떠나지 못하여, 그 맛이 無窮하고 그 用이 無盡하다. 迂回하는 것도 아니며 遙遠한 것도 아니며, 지극히 쉽고 지극히 가까운데, 사람이 근심하여 그 힘을 쓰지 않을 뿐이다. 어느 날 힘을 쓰면, 능히 이르지 못할 者가 없는 것이다.

 其九

九曲將窮眼豁然  九曲이 다하려 하니 眼界가 豁然하여,
桑麻雨露見平川  桑麻눈 雨露에 젖고 平川이 보이도다.
漁郞更覓桃源路  漁郞은 다시 桃源 가는 길을 찾으나
除是人間別有天  이곳을 除外하고 人間에 別天地가 있겠는가?

 豁然은 貫通이니, 障礙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日用이 沛然하고 萬事가 모두 다스려진다. 비록 잘 聖域에 들었더라도, 百姓이 日用하는 尋常事가 아니면 始作하지 못한다. 무릇 어찌 人間世上을 離絶하여, 매우 높아서 행하기 어려운 일이 있겠는가? 所謂 道라는 것은, 이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만약 이것을 버리고 道를 찾는다면 모두 異端邪說이요, 誣民惑世의 論이다. 天理가 없으니, 聖賢君子가 屛絶하는 바요, 이를 胸中에 남겨두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書經集傳 序

慶元己未冬에 先生文公이 令沈으로 作書集典케 하시고 明年에 先生歿하시고 又十年에 始克成篇하니 總若干萬言이라. 嗚呼라 書豈易言哉아 二帝三王 治天下之大經大法이 皆載此書하니 而淺見薄識이 豈足以盡發蘊奧리오 且生於數千載之下하여 而慾講明於數千載之前하니 亦已難矣라

慶元(南宋 寧宗의 연호) 己未年(1199) 겨울에 朱文公이 나로 하여금 書集傳을 짓게 하시고 이듬해에 선생이 별세하였으며, 다시 10년 만에 비로소 책이 이루어졌으니, 모두 약간 萬字이다.
아! 書經을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二帝, 三王이 천하를 다스린 大經大法이 모두 이 책에 실려 있으니, 식견이 얕은 자가 어찌 깊은 뜻을 다 발명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수천 년 뒤에 태어나서 수천 년 전의 것을 講明하려 하니, 또한 이미 어려운 것이다.

然二帝三王之治는 本於道하고 二帝三王之道는 本於心하니 得其心이면 則道與治를 固可得而言矣라 何者오 精一執中은 堯舜禹相授之心法也요 建中建極은 商湯周武相傳之心法也니 曰德, 曰仁, 曰敬, 曰誠이 言雖殊나 而理則一이니 無非所以明此心之妙也라 至於言天則嚴其心之所自出이요 言民卽謹其心之所由施니 禮樂敎化는 心之發也요 典章文物은 心之著也요 家齊國治而天下平은 心之推也니 心之德이 其盛矣乎인저 二帝, 三王은 存此心者也요 夏桀, 商紂는 亡此心者也요 太甲, 成王은 困而存此心者也니 存則治하고 亡則亂하나니 治亂之分이 顧其心之存不存如何耳라 後世人主 有志於二帝三王之治인댄 不可不求其道요 有志於二帝三王之道인댄 不可不求其心이니 求心之要는 舍是書면 何以哉리오

그러나 二帝, 三王의 정치는 道에 근본하였고 二帝, 三王의 도는 마음에 근본하였으니, 그 마음을 알면 道와 政治를 진실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인가? 精一執中은 堯, 舜, 禹가 서로 전수한 心法이요, 中을 세우고 極을 세움은 商나라 湯王과 周나라 武王이 서로 전수한 心法이다. 德과 仁과 敬과 誠이 글자는 비록 다르나 이치는 하나이니, 모두 이 마음의 묘함을 밝힌 것이다. 하늘을 말함에 이르러는 마음의 所自出을 엄하게 하였고, 백성을 말함에 이르러는 마음이 말미암아 베풀어짐을 삼갔으니, 醴樂과 敎化는 이 마음에서 나온 것이요, 典章과 文物은 이 마음이 드러난 것이요, 집안이 가지런해지고 나라가 다스려져서 천하가 평안해짐은 이 마음이 미루어 확대된 것이니, 마음의 德이 盛大하다 할 것이다.
二帝와 三王은 이 마음을 보존한 자이고, 夏나라 舜王과 商나라 紂王은 이 마음을 잃은 자이고, 太甲과 成王은 애써서 이 마음을 보존한 자이니, 보존하면 다스려지고 잃으면 혼란하니, 다스려짐과 혼란함의 구분은 마음을 보존하느냐 보존하지 못하느냐의 여하에 달려있을 뿐이다. 후대의 군주가 二帝, 三王의 정치에 뜻을 두려 한다면 그 道를 찾지 않을 수 없고, 二帝, 三王의 道에 뜻을 두려 한다면 그 마음을 찾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마음을 찾는 요점은 이 책을 버린다면 무엇으로 하겠는가.

沈이 自受讀以來로 沈潛其義하고 參考衆說하여 融會貫通일새 乃敢折衷호되 微辭奧旨는 多述舊聞이요 二典禹謨는 先生이 盖嘗是正하사 手澤尙新하니 鳴平惜哉라 集傳은 本先生所命이라 故凡引用師說을 不復識(지)別하노라 四代之書를 分爲十卷하니 文以時異나 治以道同이라
聖人之心見於書가 猶化工之妙著於物하니 非精深이면 不能識也라 是傳也 於堯舜禹湯文武周公之心에 未必能造其微어니와 於堯舜湯文武周公之書에 因是訓詁면 亦可得其指意之大略矣리라 嘉定己巳三月旣望에 武夷蔡沈은 序하노라

나는 이 책을 배워 읽은 이래로 그 뜻에 침잠하고 여러 학설들을 참고하여 融會貫通하고서야 이에 감히 절충하되 隱微한 말과 깊은 뜻은 옛날에 들은 것을 기술함이 많고, 二典과 大禹謨는 선생이 일찍이 시정하시어 손때가 아직도 새로우니, 아! 애석하다.
集傳은 본래 선생이 명하신 것이므로 인용한 모든 師說을 다시 별도로 標識하여 구별하지 않았다. 虞, 夏, 殷, 周 四代의 글을 나누어 6卷으로 만들었으니, 글은 때에 따라 다르나 정치는 道가 같다. 聖人의 마음이 책에 나타남은 化工(하늘의 조화)의 묘함이 물건에 드러나는 것과 같으니, 精深한 자가 아니면 알 수 없다.
이 集傳은 堯, 舜, 禹, 湯, 文, 無, 周公의 마음에 있어서는 비록 그 은미한 경지에 나아가지 못하였으나 堯, 舜, 禹, 湯, 文, 無, 周公의 글에 있어서는 이 訓詁를 따르면 또한 그 뜻의 대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嘉定 己巳(1209) 3월 旣望에 武夷 蔡沈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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