修心正經(수심정경)
진강(증산법종교 대구지부장)님이 주신 자료입니다.
제1장 명정정대지(明定靜大旨)
무릇 수양을 하는 사람은 그 망념을 닦고 그 진성을 기르는 것이니, 성품을 기르는 공부는 정정으로써 본을 삼아야 하리라. 정정(定靜)의 공부법은 지극히 넓고 지극히 큰 서원을 품음으로서, 지극한 정성과 지극한 믿음을 발하여 생각과 생각을 잊어버리지 아니한즉 정하고 고요함을 가히 얻으리라.
정(定)이란 것은 하나로 이에 정하여 모든 다른 도리가 나의 짓는 바에 더함이 없고, 저 허다한 법술(法術)이 세상을 의혹케 하는 데에 빠지지 아니할 뿐이다. 정(靜)이란 것은 하나로 정(定)한데 돌아와서 다시 다른 데로 움직이지 아니하여, 부귀영화도 능히 마음을 달래어 가지 못하고 금옥 보패도 가히 뜻을 뺏어가지 못할지니, 한 뜻이 정하는 데에 서 있음에 다섯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한 즉 맹자(孟子)의‘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한 것’과, 노자(老子)의‘근본에 돌아와 고요하다’함이 다 이 정정(定靜)을 이름이니라.
위로 색지경(色至境)이 없고 아래로 욕심 바다가 없어서, 한 생각으로 일만 년이 가면 귀와 눈이 한가지로 맑고, 몸과 마음이 한가지로 잊어버리고, 정신과 기운이 한가지로 서늘하고, 안과 밖이 한가지로 공(空)하여〔적적(寂寂)하고 고요한데 깊이 빠져 정(定)하고 담연(湛然)함이 하나에 이르러서, 먼저 나의 한 마음 하늘을 온전히 한 뒤에〕정신 기운이 냉랭(冷冷)하여 맑고, 정신 빛이 형형(炯炯)하게 밝아서 비치지 아니한 땅이 없고 통하지 아니한 이치가 없느니라. 그러나 만약 시끄럽게 움직인즉 정신 기운이 몽몽(懵懵)하게 어둡고 정신 빛이 암암하게 어둡나니, 어찌 생각하고 생각 두는 바에 유익이 있으리오.
정정(定靜)함이 오직 면면하고 밀밀해서 생각이 잊어버리지 아니한즉 한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하고 일백 맥이 근원에 돌아와서 자연히 불은 내리고 물은 오르며 기운이 정(定)하고 정신이 맑아져서 드디어 큰 광명이 나타남에, 위로 하늘 지경을 통하고 아래로 땅 지경을 달하여 공공(空空)하고 통통(洞洞)함에 광명이 갓이 없고 동하여도 사이가 없어서, 귀신의 지경을 통하여 보고 하늘 문을 사무쳐 여느니라.
제2장 명금기(明禁忌)
공부하는 데에 다섯 가지 꺼리는 것이 있으니,
첫째는 무슨 일이든지 무슨 말이든지 이루기로 하는 곳에 믿지 아니함이요,(不信正法)
둘째는, 정당한 법과 상당(相當)한 일을 만홀(漫忽)히 하여 존중하지 아니함이요,(不謹嚴)
셋째는, 시비를 알지 못하고 자의로만 집착함이요,(執着自意, 不知是非固執自意)
넷째는, 가볍고 흔들려져서 과히 기뻐하고 과히 즐겨하는데 끌림이요,(輕發喜惡)
다섯째는, 먼저하고 뒤에 할 바를 알지 못하고 속히 하고자 하는 마음이니,(生欲速心) 이것이 다 큰 병이라 반드시 사도에 떨어지나니, 공경하고 삼가라.
만약 처음으로 배우는 사람이 고요히 앉음에 반드시 나의 마음이 안정하지 못한 데에 괴로워서 번거하고 잡된 생각을 금하기로 한즉 도리어 잡된 생각이 더 나나니, 오직 너그럽고 부드러움을 주장하여 자연한데 돌아가고 보면 정하고 고요함을 스스로 얻으리라.
비하건대, 탁한 물이 맑아지기를 기다림에 급히 맑히고자하여 자주 상고하고 자주 살핀 즉 흙물이 더욱 일어나는지라, 그러므로『정관경(定觀經)』에 이르기를, 마음 묶기를 가장 급히 하므로 먼저 웃 경계를 하였느니라. 만약 혹 정하지 못하여 악한 경계가 나타나면 마음 돌리기를 민민(泯泯)하게 하고 뜻 구하기를 한한(閒閒)하게 하며, 선생의 가르침과 자기의 원하는 바를 밀밀(密密)하게 생각하면 자연히 정하고 고요하리라.
무릇 공부를 할 즈음에 일만 형상이 삼연(森然)하게 벌이나니, 가히 게을리 하지도 못하며 급히 하지도 못할 것이요 분운한 번화(繁華) 머리가 다 마음 머리를 좇아 나가나니, 일체 이 기이하고, 현수(現殊)하게 드러나고, 승(勝)하고자 하고, 좋아하고, 원망하고, 응(應)하고, 변(變)하는 일이 다 자기 마음 나는 대로 베풀며 자기 마음 구하는 대로 나타나느니라.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 가운데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이 있어서 도심이 인심으로 하여금 끌리고 잡혀서 사사(邪私)한 데에 떨어지게 되면, 바른 마음은 물러가고 간사한 마음이 차차 나나니 어찌 삼가지 아니 하리오. 또 유명(幽冥)한 경계는 다만 나의 한번 생각을 궁굴려 옮기는 곳에 있나니, 번화 머리 베푼 바에 삼가 마음을 부리지 말라. 만약 혹 보이는 것을 보아도 보지 아니한 것과 같이 하여 조금도 마음과 뜻에 걸지 아니 하고, 반드시 한 점 참마음으로써 도리어 현묘한 데에 돌아와서 정성이 지극히 한결같으면 철석이라도 가히 열리고 뼈와 살이 얼굴을 나눈지라.
마음은 일만(一萬) 신령의 주장이 되고 몸은 음양 조화의 집이 되나니, 음부경(陰符經)에 이르기를,“다섯 도적이 없으면 우주가 손에 있고, 일만(一萬) 화(化)가 몸에 난다.”는 것은 이것을 이름이니라. 근래 세상에 수련하는 사람이 왕왕이 외구화식(外具華飾)으로써 생각만 베풀고 주문을 읽으면서 욕심을 품고 공부한다고 일컬으나, 공연히 세월만 헛되이 지내나니 어찌 참 지경에 이르리오. 대개 지극한 도(道)가 깊고 깊으나 그 다른 데에 있지 아니 하느니라.
사람이 능히 도를 넓히면 도가 사람에게 멀지 아니 하나니, 주자(朱子)는 이르기를,“도(道)란 자는 가히 잠깐도 몸에 버리지 못할 것.”이라 하셨고, 자사(子思)는 이르기를,“성품 거느리는 것을 일러 도(道)”라 하셨고, 증자(曾子)는 이르기를,“그칠 바를 안 뒤에 정(定)함이 있으니, 정한 뒤에 능히 고요하고, 고요한 뒤에 능히 편안하고, 편안한 뒤에 능히 생각하고, 생각한 뒤에 능히 얻는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다 스스로 그 밝은 덕(德)을 밝히는 일이니라. 내게 이미 밝은 덕이 있으니 어찌 수련하여 밝히지 아니 하리오. 이 일단사(一段事)는 스스로 밝은 덕을 밝히는 법이니라.
제3장 명련기방법(明鍊氣方法)
무릇 수도를 하는 사람이 만약 수화(水火)의 현묘한 이치와 오행(五行)의 나고 화하는 도를 알지 못하면 한갓 단장하고 꾸미는 아이의 희롱(戱弄)이니라.
대저(大抵) 정정(定靜)하고 수련하는 법은 이에 나의 몸 조화하는 도를 단련하여 진실로 힘써 행하면 마음 불이 아래로 내리고 신경(腎經) 물이 위로 오르나니, 진일(眞一)한 물이 입에 가득하여 달고 윤활하고 향기 나고 맛난 것은 곧 신경(腎經) 가운데 진수(眞水)가 위로 오르는 기별이니라.
감(坎)과 이(离)가 사귀어 통하고, 물과 불이 이미 건넨 뒤에 조화가 다 위로 니환(泥丸)에 조회(朝會)하나니, 나의 한 점 신령한 빛을 운전한즉 화하여 남창상궁(南昌上宮)에 불방울이 되어 위로 니환현궁(泥丸玄宮)을 뚫어서 이마 문(門)이 미미하게 움직이나니, 인(因)하여 정성으로 행한즉 이마 문이 활연하여 처음에는 일만(一萬) 개미가 모이고 모이는 형상과 같아서 심히 가렵고 가려워지나니, 삼가 긁고 만지지 말고 정신과 정신을 이마 위에 모인즉 홀연히 맑은 우뢰(雨雷) 한 소리에 이마 문이 큰 돌이 벌어진 것과 같아서, 한 몸에 일만 신령(神靈)이 다 이 문으로 출입하면 형모(形貌)의 광명이 보름달과 같고 삼계 천진(三界天眞)이 구름같이 니환(泥丸)에 모여, 기뻐하고 즐거워함이 한 몸 지친(至親)과 같나니, 이것은 이에 묵묵히 상제(上帝)님께 조회(朝會)하는 법으로 실상(實相)한 이치이니라.
이 법을 행하는 자는 마땅히 먼저 뜻을 아래 단전(丹田)에 머무르고 담연(湛然)히 오래 앉으매 물과 불이 사귀어 통하여 옥지(玉池)에 물이 나서 입안 가득히 삼켜 내리면 정령(精靈)이 이에 올라서 위로 니환 이마 문에 조회하느니라. 만약 옥지의 물을 삼켜 내리지 아니 하면 다만 불이 올라와서 육신과 정신을 태우느니라. 그러므로 행하고 수련하는 사람이 매일 밤 반(半) 맑은 새벽에 항상 안으로 수련함을 행하여 마음에 불은 내리고 물은 오르는 형상을 생각하고 뜻에 감(坎)과 이(离)가 사귀어 통함을 두면 자연히 물과 불이 서로 순환하여 생각을 오래 궁굴려 온전히 읽히면 정신이 니환에 모이고 불방울이 이마 문에 발하나니, 이것이 도전(道傳)하는 비밀(秘密)함이요, 도(道) 닦는 요긴함이요, 도 깨닫는 참 비결이니라.
먼저 정(定)하고 고요한 법을 행함이 대개 이 일에 말미암을 따름이니, 정하고 고요함이 아니면 물과 불이 오르고 내리지 아니 하므로 이것을 얻는 자는 가히 날을 한정하고 성공하리라.
제4장 명입문요법(明入門要法)
선요(禪要)에 이르기를“큰 요긴함이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크게 믿음이요, 둘은 뜻을 크게 분(忿) 내는 것이요, 셋은 크게 의심(疑心) 내는 것이니, 의심이란 것은 신(信)으로써 체가 되나니, 신이 십 분(十分)이 있으면 의심이 십 분이 있고 깨달음이 십 분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곧 정하고 고요한 빠른 법을 말함이니라. 어찌하여 그러한가? 큰 원(願)이 없으면 지극한 정성이 나지 아니 하고, 큰 의심이 없으면 죽기로써 하는 분이 나지 아니 하고, 큰 신이 없으면 참 의심이 나지 아니 하느니라.
여쭙기를,“어찌하여 원하는 가운데에서 신이 나고 분이 나고 의심이 나고 정성이 나는 것입니까?” 답하여 가로되,“한 하늘 아래에 지극히 묘하고 지극히 보패(寶貝)되고 지극히 착하고 지극히 높은 법은 오직 한 영보진국(靈寶眞局)이라, 영보국(靈寶局)은 사람사람이 각각 몸 안에 품부(稟賦)하여 있나니, 곧 하늘이 명하신 나의 본래성품(本來性品)”이라고 말씀하셨다.
성품을 거느려서 도를 닦고 덕을 밝혀 빛을 발하면 가히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平)하며, 가히 억조(億兆)의 군(君)과 스승이 되며, 가히 한량없이 수(壽)하는 신선(神仙)이 되느니라. 어찌하여 그러한가? 가로되,“하늘이 명하신 덕이 품부(稟賦)가, 사람 될 처음에 머리는 위에 삼청진궁(三淸眞宮)의 기운으로 화하고, 배는 아래 산림천택(山林川澤)의 얼굴을 받고, 가슴은 일월성신(日月星辰)과 풍운우뢰(風雲雨雷)와 음양조화의 부락을 품었나니, 이는 바로 나의 몸에 천진제군(天眞帝君)과 구령삼정(九靈三精)과 오신진군(五神眞君)과 내외장군(內外將軍)과 좌우관속(左右官屬)과 제부공조(諸府工曹)와 및 팔만사천원군(八萬四千元君)이 각각 부락을 의지하여 나뉘었으니, 이것이 이에 영보도국(靈寶道局)이니라.
닦아서 밝은 자는 신선이 되고 성현이 되며, 그 마음을 놓아 버린 자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느니라. 닦아서 밝히고자 하는 자는 큰 원이 아니고 보면 무엇을 하리오. 또 사람사람이 각각 이 영보국이 있으니, 어떠한 사람은 얻으며 어떠한 사람은 얻지 못하는 것인가? 라고 큰 분이 나게 되면“일만 이치가 나에게 갖추고 일만 법이 여기에 갖추었나니, 오직 하나 뿐이거늘 도가 어찌 문이 많으며 오직 하나 뿐이거늘 법이 어찌 길이 많으며, 오직 하나 뿐이거늘 사람이 어찌 많이 구하며 오직 하나 뿐이거늘 내가 어찌 다시 의심하리오.”하고 생각하면 의심이 없어지고 바란 즉 의심이 있나니, 의심이 가고 의심이 옴에 의심할 바가 없거늘 공연히 무엇을 의심하리오. 홀연히 마음 생각을 태워 밝히면 이것이 이에 참 의심이니라. 이 의심 아래에 일만 의심이 고요하고 적적하여 주야를 분간 못하여 꿈도 같고 참도 같아서 텅 비고 적적한 천지에 오직 한 의심뿐이거늘 이것이 큰 의심이 아니고 무엇이리오.
대개 의심 의(疑)자의 공부가 가장 알아 얻기가 어려우니, 만약 크게 믿는 마음이 없으면 참 의심이 나지 아니하므로 선요(禪要)에 이르기를,“신(信)이 십 분이 있으면 의심이 십 분이 있고 깨달음이 십 분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것을 가르쳐 이름이니라. 신(信)함을 가히 신할 것이요 정성함을 가히 정성할 것이니, 신으로써 정(定)하고 고요하며 신으로써 분 내고 의심 내나니, 크게 믿음이 아니면 신이 어찌 장구(長久)하리오. 한 번 정함이 변하지 아니하여 시(始)와 종(終)이 한결같으면 이것을 일러 정성이라 하느니라.
옥경(玉經)에 이르기를,“정성으로써 도에 들어가며, 묵묵함으로써 도를 지키며, 부드러움으로써 도를 쓴 즉, 자타가 한 가지로 잊어버리고 밝은 빛이 이에 나며 성인의 지혜가 스스로 온전하다.”하였고, 또 음부경(陰符經)은 전부 영보(靈寶)의 시와 종을 발하여 가르침이라, 그러므로 이 영보를 수련하는 사람이 음부(陰符)로써 정정(定靜)의 원경(元經)을 삼아서 밖으로 외우고 생각하며, 안으로 정하고 고요하면 이것이 영보의 시와 종이 다 음부 三편에 있으므로 옛 법을 영보에 전함이니라.
본래 문자(文字)가 없고 다만 구결(口訣)로만 음부를 줄 뿐이라, 그러므로 영보의 참 도를 아는 자가 드문지라, 이제 이미 문자가 있고 또 가령(假令)을 기록하였으니 어찌 화창하게 밝히지 아니하리오. 다시 선현의 수련하는 지도(指導) 문자(文字)에 더하여 앞으로 오는 학도(學徒)의 도 배우는 마음을 열리게 하나니, 또한 가히 이르되 수련하는 공부에 일조가 되니 마음을 씻고 새로이 읽을 것이니라.
옛적에 서봉도사(西峰道師)가 학도에게 이르시기를,“천하에 주인 없는 한 집이 있으니 이것이 영보국이라, 그 가운데 천하 무궁한 묘함과 무궁한 보패와 무궁한 재물을 감추어 놓고 팔만 사천 문로(門路)를 통하여 열어 놓고, 담과 담을 둘러쌓고 욕심 있는 자와 게으른 자와 어리석은 자와 불신하는 자로써 각각 여러 문로를 지키라.”하고 명령하기를,‘탐하고 욕심 있고 게으르고 어리석고 불신하는 자가 와서 이르면 너희 등이 각각 지켜서 단단히 막고, 비록 아무라도 정성 있고 믿음 있고 온전하고 한결 된 자가 와서 이르면 문을 열어 들이어서 빈집 주인을 삼아 무궁한 재물과 보패를 허락하여주라.’이르니, 세상 사람이 다 이 말을 듣고 웃으면서 버리고 취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이러한 재물과 보패를 내가 어찌 감히 취하리오. 이것은 복 있고 인연 있는 자가 마땅히 취할 바이라.’하여 감히 가서 구하지 아니 하니, 석가(釋迦)가 말을 전하시고 노자(老子)는 길을 가르치시고 공자(孔子)는 권하여 보냈으나 또한 나아가 취하지 아니 하고, 혹 가는 자는 불신이 있어서 막아 받지 아니 하고, 또한 탐욕 있고 나태하고 어리석은 자도 막아서 안으로 들이지 아니 하나니, 그 사이에 능히 들어가 취하는 자는 오직 천만 사람 가운데에 한 두 사람뿐이요, 그 나머지는 불신하고 욕심 있고 게으르고 어리석은 자이라.
슬프다! 이 세상 사람들이여! 넓고 편안한 집을 거하지 아니 하고, 바른 길을 놓고 가지 아니 하고, 모두들 사람의 재산을 도적질하고, 혹 부자의 남은 재물을 빌고, 혹 길가는 사람의 로비(路費)를 빼앗고, 혹 벽을 뚫고, 혹 속여 취하고, 혹 기한(飢寒)하고, 혹 다투고 싸움하여 다섯 도적이 아울러 일어나고 세 도적이 쉬지 아니하여 천하가 크게 요란하니, 법관이 형벌을 쓰고 친한 벗이라도 또한 비방하고 사람의 유(類)에 들지 못하게 하나니 가히 일러 한심할 곳이라.
그 사람의 하는 바는 마땅히 취하지 아니할 바를 취하여 말하기를,‘내가 빠른 법을 행하여 쉽게 취하고 쉽게 얻는다.’하여 혹 죽고 혹 패함에 괴로움을 받아도 후회할 줄 모르고 도리어 지리(支離)함을 보니, 이것이 어리석은 것인가 게으른 것인가? 공자의 이른바 분토(糞土)의 담장이요, 맹자의 이른바 하우(下愚)에 옮기지 아니한 자가 이것이 그 무리들이니라.
선서(禪書)에 이르기를,“능히 여러 문 가운데에 한 문을 열고 들어가서 무궁하게 갊은 보패를 취하여 써도 다함이 없고 취하여도 금하는 자가 없으니, 이 보패가 밖으로부터 오는 물건이 아니요 이것이 집안에서 나고 나는 무궁한 물건이니라.
능히 당(堂)에 오른 자는 정성이요 능히 문을 여는 자는 의심이요 능히 물건을 주장하는 자는 신이요 의리에 다른 사람의 재물과 보패를 취하지 아니 하고 마땅히 취할 물건을 취하는 자는 분(忿)이니라. 만약 신과 분과 의 세 글자가 없다면 담 밖에 반환(盤桓)하고 처마 앞에 두류(逗遛)하여 세월을 만연(挽連)하여 지냄에 공연히 기운 힘을 허비하다가 한심하고 물러가서 이에 돌아다니며 얻어먹는 사람이 되느니라.
그러므로 비유하여 이르기를,“돌 가운데 갊은 옥은 철정(鐵釘)이 아니면 캐지 못하고, 여석(礪石)이 아니면 갈지 못한다.”하였고, 또 이르기를“범의 소굴에 들어가지 아니 하면 어찌 범의 자식을 얻으리오.”하였으니, 철정은 신심을 말함이요 여석은 의심을 말함이요, 범의 소굴에 들어가는 것은 분심을 말함이니, 캐고 갈고 범의 자식을 얻고자 하는 자는 큰 분을 용맹 있게 발하여 금강리(金剛利)같은 예리한 칼로 세상 모든 인연을 끊고 큰 의심을 발하여 요망한 마음과 번거한 뜻을 곧 죽여 없애고 큰 신을 품어서 능히 이 문에 들어온 연후에야 철주(鐵柱)의 중심이 되고 석벽(石壁)의 외면이 되어, 천만 스승의 말이라도 다시 이 말보다 더 묘함이 없고, 묘한 도와 현현(玄玄)한 이치가 또 이 도에 더함이 없으며, 또 눈에 좋게 보이는 바가 없으며, 귀에 기꺼이 들리는 바가 없으며, 묘함이 다른 묘함이 없으며, 보패가 다른 보패가 없으니, 한 마음이 정하고 고요함에 탕탕(蕩蕩)하고 활활(豁豁)하여 작은 먼지만한 것도 어리고 막힘이 없으니, 사람이 처음 태어난 것과 같아서 차(茶)를 마셔도 차인지 알지 못하고 밥을 먹어도 밥인지 알지 못하고 행하여도 행하는 줄 알지 못하고 앉아도 앉았는지 알지 못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서, 정의(情意)와 식심(識心)이 돈연(頓然)히 끊어지고 계교가 도무지 잊어 버려서 기운과 호흡은 있으나 죽은 사람과 같고 또는 허수아비나 흙으로 만든 사람 형상과 같나니 이것은 정(靜)에 잠겼을 때를 이름이요, 정에 잠겼다가 홀연히 기운이 발하여 정신이 동한즉 잠을 곤히 자다가 잠을 깬 것과 같아서, 모든 일에 종(宗)이 없고 차서를 차리지 못하므로 무엇이나 대질리는 곳이 서로 어긋나고 어긋나나니 이것은 정에 잠겼다가 정을 깨쳐 나오는 형상을 이름이요, 정을 깨쳐 마음이 차차 밝아진즉 마음 빛이 돈연히 발하여 시방에 통연(洞然)함에 태양빛이 하늘에 밝은 것과 같고 명경(明鏡)이 대(臺)에 당한 것과 같아서 무엇이든지 한 생각에 넘지 아니하여 동연히 밝게 깨달음을 이루나니, 이 지경에 이른 자는 불가의 부처요 영보국의 성현이요 선가의 신령한 단(丹)이니라.
그러나 만약 신분의성이 지극하지 못하면 팔만 사천 마희(魔戱)군사가 육근 문머리에 엿보고 있다가 기틀을 따라 마음을 달래어가고 백방으로 조화를 지어서 사면(四面)의 번화(繁華) 머리에 심신(心神)을 괴롭게 하고 시끄럽게 하나니, 그럴 때에는 곧 성현의 가르침과 자기 공부하는 본의를 생각하며, 또 요긴한 방법은 무심하기를 주장하고 정력을 더하여 날을 한정한 공부에 나아가며, 비하건대 나의 몸으로 하여금 천척정저(千尺井底)와에 떨어진 형상과 같이 하여, 아침으로부터 저녁때에 이르고 저녁때로부터 아침에 이르기까지 일천 번 생각하고 일만 번 생각하는 것이 결단코 오직 빠져나오기를 구하는 마음이요 결단코 두 마음이 없어서 진실로 능히 이와 같이 한다면 공부 베풀기를 날을 한정하고 가히 기약하리라.
이 말은 곧 상화(相火)와 허화(虛火)가 있고 강기(强氣) 있고 건장한 사람이라야 마땅히 취할 바이요, 또 만약 유온(柔溫)하고 기약(氣弱)한 사람인즉 나의 몸이 죽을 죄에 당함으로 깊이 옥(獄) 가운데에 갇혀서 날을 한정하고 베이어 죽을 차(次)에, 사면을 수직(守直)하다가 홀연히 옥졸(獄卒)이 취하여 잠들 때를 당하니 때에 밤이 적적하고 고요할 때에 수갑을 풀고 잠긴 쇠를 부수고 옥을 넘어 몸을 벗어난즉 동서를 분간하지 못하고 곧 도망하여 지경을 나갈 즈음에, 독한 룡(龍)과 모진 짐승이 앞에 당하여도 두려운 마음이 없고 화살과 돌과 칼과 창도 또한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없어서 빨리 달아나기를 무릅쓰고 기구(崎嶇)히 험한 길을 평지같이 밟으며 가시덤불을 초개같이 보나니, 이것이 어떠한 연고인가 하면, 차라리 다른 데에서 죽을지언정 이 옥 가운데에서는 죽지 아니할 뜻이니라. 이것은 이에 극절한 마음이니 공부할 즈음에 이 간절한 마음이 있으면 날을 한정하고 할 공부요 일백 번이라도 마치는 공부니라.
그러나 이 극절한 말은 공부해 나가는 길과 큰 취미를 얻은 사람이 자연히 행하는 법이요, 사람마다 취하고 사람마다 행하는 법은 아니니라. 누구를 물론하고 공부의 길을 자상히 알며 큰 취미를 얻는 사람은 자연히 그리 되나니, 그 길과 맛을 알기로 하면 위태한 마음을 편안히 하고 선인(先人)의 가르침을 잊어버리지 말고 생각이 전일하면 정정(定靜)을 가히 얻을 것이요 극절한 공부에 나아가느니라.
제5장 명풍토이화지공(明風土移化之功)
정정을 얻은 후에는 미미하게 피어나는 광명이 날로 돋우나니, 오직 정(精)하고 오직 하나라야 진실로 그 가운데를 잡을 것이요, 반드시 가운데에 떳떳하면 중용(中庸)이요 대체를 배우면 대학(大學)이요 도리를 의논하면 논어(論語)라, 원형이정(元亨利貞)과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성품을 따라 느껴 나타나나니 혹 성인과 현인이 곧 풍토의 품수(稟受)는 스스로 다르나 기운 바탕은 같은 자이니라.
그러나 이 나의 영보 참 비결은 사람을 잘 화하게 하는 자이니, 많이 정정편(定靜篇)을 외우고 음부의 뜻을 보존하여 생각하고, 기운을 수련하여 물과 불을 운전하면 풍토를 가히 옮길 것이요 참된 데에 돌아와 착한 데에 밝아서 삼재(三才)에 참예하고 일만 번 화하는 데에 남에 성인과 내가 더불어 같으리라. 성현의 수련하는 법이 다시 이 외에 더 요긴함이 없고 부처와 보살도 다 이와 같이 수련하였으니 이와 같이 수련하는 자는 서로 같으리라.
공부하는 사람마다 이대로 어긋남이 없으면 별로 더디고 속할 것도 없고 먼저 하고 뒤에 함도 없으므로 공부의 대기한은 10년을 한정하면 무불관통(無不貫通)인데 10년 내에 매년 입선기한은 혹 90일로 정하여 2회도 하고, 혹 50일로 정하여 4회도 하는 가운데, 도를 깨는 때에는 정에 잠긴 3일 후에 깨기도 하고 혹 5일 후에 깨기도 하고 혹 7일 후에 깨기도 하고 혹 반시 내에 깨기도 하나니, 공부 한정이 빠르기로 하면 빠르고 멀기로 하면 먼 것이 다 지극히 정성하는 데에 있느니라.
공부하는 사람이 도 깨치기가 더디고 어려운 데로 보면 천년 눈먼 거북이 만리성에 몸을 벗어나기와 같고 3일이나 굽은 바늘로 작은 겨자씨를 던져 뚫기와 같고, 쉬운 데로 보면 지속(遲速)은 물론하고 공부하는데 다른 수고가 더 있는 것이 아니라 공부가 순숙되도록 몸과 마음이 점점 한가해지며, 천척정저에 떨어졌던 사람이 평지에 나온 것과 같고 옥에 갇혔던 사람이 옥 밖에 나온 것과 같은데, 무엇을 인하여 지속을 말하며 되고 안 되는 말을 하리오.
도를 배워 가는 사람이 급속하고 위태한 마음을 차차 경계하여 천인(天人)을 원하여 배우고 다른 사사한 도에 뜻을 망령되게 말고, 하나로 나의 영보국 중에 나아가서 스스로 밝히면 가히 신선도 되고 가히 부처도 되고 진인도 될 것이니, 도문의 모든 학도는 많이 이 책을 외우면 기운이 화하고 정신이 화하여 가히 정하고 고요함을 얻으리니 닦아 밝혀서 이에 그 성품을 회복하는 것이 가할지니라.
제6장 명정정차제(明定靜次第)
세존이 좌현진인(左玄眞人)에게 말씀하시기를,“대범 도를 닦고자 할진대 먼저 능히 번거한 일을 놓아버릴 것이니라. 밖으로 번거한 일이 모두 다 끊어지고 마음에 젖은 바가 없는 연후에 편히 앉아서 안으로 마음 일어남을 보는 자가 한 생각 일어남을 깨워서, 이에 세속 인연과 좋은 낙을 제거하고 멸한 후에 안정하기를 힘쓸 것이니라.
그 다음에는 비록 적실히 탐하고 착(着)함이 없다고 하나, 부유난상이라도 또한 다 멸하여 제거하고 주야 근행하여 잠깐이라도 떠나지 아니할 것이니라. 오직 번뇌와 망상은 멸할 것이요 대중 잡는 마음은 멸하지 아니하며 다만 비우는 데에 마음을 어릴 것이요 주착하는 데에 마음을 어리지 아니할 것이니라. 또는 하나라고 하는 데에도 의지하지 않는 것이 마음의 떳떳한 것이니라. 만일 주하면 마음이 조급해져서 다투고 다투며 번거한 생각이 더 일어나느니라. 또는 처음으로 배움에 마음 붙잡기가 심히 어려우니 혹 붙잡아도 붙잡지 못하여서 잠깐 머물렀다가 도로 잃어버리느니라.
그러나 마음 붙잡을 때에 가고 머무는 것이 사귀어 싸움에 백체(百軆)가 유행(流行)하여 오래 오래 싸우는 정신을 놓지 아니 하면 바야흐로 이에 조숙(調熟)하나니, 잠깐도 마음을 붙잡지 못한다고 근심하지 말고 다만 일천 가지 일 생기는 근원을 없앨 것이라, 차차 마음이 밝아진즉 행하고 서고 앉고 누울 때와 일을 건넬 곳과 시끄럽고 고요한 곳에 다만 편안하기만 주장하며, 일이 있든지 일이 없든지 항상 무심하기를 주장하며, 고요한 데에 처하든지 시끄러운 데에 처하든지 다만 뜻만 오직 한결같이 할 것이니라. 만일 마음 정(定)하기를 가장 급히 하면 곧 병이 생겨서 기운이 발하여 미쳐 엎어지나니, 이것이 그 급한 마음으로 일어난 병이니 그리 알라.
학도자(學徒者)가 만일 마음을 붙잡아서 동하지 아니 하면 또한 희로애락에 놓아 맡겨볼 것이니라. 그리하면 넉넉하고 급함이 곳을 얻어서 자연히 항상 골라 맞으며, 마음을 써도 착함이 없으며, 놓아도 동하지 않으며, 시끄러운 데에 처해도 악한 마음이 없으며, 일을 건네도 번뇌심이 없는 자가 이것이 참 진정(眞定)이라, 일을 건네지 아니 하면 번뇌가 일어나지 아니 하므로 일이 많음을 구하며, 시끄러운 처소를 당하지 아니 하면 악한 마음이 나지 않으므로 강연히 시끄러운 처소에 가보느니라.
일 없는 것으로써 참 성정(性靜)을 삼고, 일 있는 것으로써 응하는 자취를 삼느니라. 이대로 하면 물과 명경으로 햇빛을 대한 것과 같아서 물건을 따라 얼굴을 나타내느니라.
선하고 교교한 방편이 오직 능히 정에만 들어가게 하는 것이요, 지혜 발함의 더디고 속함이라 하는 것이 사람에게 말미암지 아니 하나니, 정 가운데 혜를 구하지 말라. 급히 구하면 성정을 상함이요 성정을 상하면 혜가 없어지느니라. 마음 밝아지는 이치가 정 가운데 혜를 구하지 않아도 혜가 자연히 나나니, 이것을 일러 참 혜라고 이름 하느니라.
혜를 얻은 후에 혜가 있어도 쓰지 아니하며, 안으로는 지혜가 밝되 밖으로는 어리석은 것과 같이 하여 더욱 정과 혜를 온전히 하면 쌍으로 아름다움이 한량이 없으리라.
만일 정 가운데 생각과 생각이 많이 일어나면 뭇 사사가 정신을 요망하게 하며 일백 마취가 마음을 따라서 보는 바를 응하여 따르느니라.
세존과 제불 진인의 법을 이에 밝히노라. 학도자가 만일 마음을 붙잡아서 참 정이 된 마음으로 하여금 위로 활연(豁然)히 덮은 바가 없으며 아래로 광연(曠然)히 걸린 바가 없게 되면, 구업은 날로 사라지고 신업은 다시 짓지 아니하며 얽히고 얽힌 바가 없어서 진롱(塵籠)을 멀리 벗어나나니, 그리 되는 자는 행하기를 오래하면 자연히 도를 얻느니라.
대범 도를 얻는 사람이 무릇 일곱 가지 통함이 있으니,
첫째는 마음을 얻어 정을 본 후에 모든 진루(塵漏)를 깨친 것이요,
둘째는 이목구비로 행하는 병이 여러 가지로 몸에 얽히고 얽힘이 모두 다 사라짐에 몸과 마음이 가볍고 서늘함이요,
셋째는 위태하고 요손(夭損)한 법을 안보(安保)하여 평탄한데 돌아와 성명(性命)을 회복함이요,
넷째는 수(壽)를 일천 년에 연하였으니, 이름 하여 선인(仙人)이라 하며,
다섯째는 형체를 단련하여 기운을 만들었으니, 이름 하여 진인(眞人)이라 하며,
여섯째는 기운을 단련하여 귀신을 만들었으니, 이름 하여 신인(神人)이라 하며,
일곱째는 귀신을 단련하여 도에 합하였으니, 이름 하여 지인(至人)이라 하느니라.
공부하는 사람이 그 기틀을 보아 기운을 따라서 더욱 밝음을 얻고 도에 이르러 혜를 이루면 이에 두렷이 갖추느니라. 만일 이에 오래 배워 마음을 정하면 몸과 마음에 한 통(通 ; 착심)도 없어야 분명한 불인(佛人)이니라.
또는 공부하는 사람이 날과 해를 재촉하며 풍속을 떠나 부모처자를 이별하여야 도를 얻는다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혜각(慧覺)이라 하니, 실은 도를 구하는 이치가 처소는 고사하고 이상과 같은 해설을 열람한 후에 선인의 가르침만 어긋나게 않으면 도를 얻느니라.
제7장 명진상지도(明眞常之道)
세존이 말씀하시기를,“큰 도가 형상이 없으나 천지를 낳고 기르며, 큰 도가 정(情)이 없으나 일월을 운전해 행하며, 큰 도가 이름이 없으나 만물을 장양하느니라. 내가 그 이름을 알지 못하되 강연히 말하면 도라고 하노라.”하셨느니라.
대범 도의 행하는 것은 맑은 것도 있고 탁한 것도 있으며, 동한 것도 있고 정한 것도 있으니, 하늘은 맑고 땅은 탁하며 하늘은 동하고 땅은 정하며, 남자는 맑고 여자는 탁하며 남자는 동하고 여자는 정하나니, 근본이 내리고 끝이 흘러서 만물을 내는지라, 그러므로 맑은 것은 탁함의 근원이요 동하는 것은 정하는 바탕이라, 사람이 능히 도를 알아 항상 청정하면 천지가 이에 돌아오느니라.
대범 사람의 정신은 맑은 것을 좋아하되 마음이 들어서 흔들어 탁하게 하며, 사람의 마음이 고요한 것을 좋아하되 욕심이 들어서 운전해 요란하게 하나니, 항상 능히 그 욕심이 마음을 운전해가는 것을 없애고 보면 마음이 스스로 고요해지느니라.
그 마음을 맑히고 보면 정신이 스스로 맑아져서 자연히 여섯 욕심(안이비설신의 육근)이 나지 아니하여 세 독(탐진치 삼독)함이 소멸하나니, 능히 도를 얻지 못한 자는 마음을 맑히지 못하고 욕심을 멸하지 못한 연고라, 능히 욕심을 멸한 자는 안으로 그 마음을 봄에 마음이 그 마음이 없으며 밖으로 그 얼굴을 봄에 얼굴이 그 얼굴이 없으며 멀리 그 물건을 봄에 물건이 그 물건이 없나니, 이 세 가지를 이미 깨달으면 오직 공한 것만 보나니 공한 것을 보는 것 또한 공해서 공이 공이라고 한 바도 없어지며, 공이라고 한 바가 이미 없어지면 없다 하는 것도 또한 없어지며, 없다한 것이 이미 없고 보면 담연히 항상 적적해서 적적함이 적적한 바가 없어지면 욕심이 어찌 능히 생기리오.
욕심이 이미 생기지 아니하면 곧 이것이 참 진정(眞靜)이라, 참되고 떳떳하게 물건을 응하며 참되고 떳떳하게 성정을 얻어서 항상 응하여도 항상 고요하면 항상 청정하느니라.
이와 같이 청정하면 점점 참 도에 들어갈 것이요 점점 참 도에 들어가면 이름 하여 도를 얻었다고 하나니, 비록 도를 얻었다고 이름 하나 실상은 얻은 바가 없고 중생을 위해서 교화하는 것을 도를 얻었다고 이름 하나니, 이것을 능히 깨달은 자는 가히 성현의 도를 전하리라.
또 말씀하시기를,“상등 사람은 자타의 마음이 없으므로 다투고 다툼이 없으며 하등 사람은 자타의 마음이 있으므로 다투고 다투며, 상덕(上德)은 덕을 써도 덕이라는 상이 없으며 하덕(下德)은 덕을 쓰면 덕이라는 상에 집착하나니, 집착하는 자는 도라고 이름 하지 않느니라.
중생이 참 도를 얻지 못하는 것은 망령된 마음이 있는 연고이니, 이미 망령된 마음이 있으면 곧 정신이 놀라며 그 정신 이미 놀라면 곧 만물에 집착함이 있으며, 만물에 집착함이 있고 보면 곧 탐한 욕심이 나며 탐한 욕심이 나고 보면 이것이 번뇌라, 번뇌와 망상이 몸과 마음을 근심하게 하고 해롭게 해서 문득 탁하고 욕된 데에 만나게 해서 생사에 흐르고 고해에 항상 잠기어 길이 참 도를 잃어버리느니라. 참되고 떳떳한 도를 깨달은 자는 스스로 얻을 것이요 얻어 깨달은 자는 항상 청정 하느니라.”
대범 움직임이 있어서 동한 것이 동하지 아니한 데에서 나며, 함이 있어서 하는 것이 하지 않는 데에서 나나니, 하는 것이 없으면 귀신이 돌아가고 귀신이 돌아가면 만물이 적적하다고 이르며, 움직이지 아니하면 기운이 정하고 기운이 정하면 만물이 생함이 없나니, 귀신과 귀신이 서로 지키며 물건과 물건이 서로 바탕 해서 그 근원과 그 뿌리를 묵묵히 깨달음에 나를 스스로 알아서 무간(無間)한데 돌아가면 죽지고 않고 나지도 않아서 천지로부터 하나가 되느니라.
또는 눈에 보는 것을 잊어버리면 광명 넘침이 한량이 없으며, 귀에 듣는 것을 없애면 마음 지식이 항상 깊나니, 두 기틀을 한 가지로 잊어버려서 뭇 묘한 문에 떨쳐남에 순순(純純)하고 순순하며 온전하고 온전해서 만물과 산하대지에 합하며 원만하고 원만하며 밝고 밝아서 낱 없는 데에 합하면 천지에 큰 물건을 내가 벼루 줄잡은 바요 만물의 여러 가지를 내가 가진 바이니, 어찌 다하고 마침이 있어서 떨어지고 부족함을 말하리오.
또 그 상 없는 것을 기르는 것이 상이 짐짓 떳떳이 있는 것이요 그 체 없는 것을 간직하는 것이 체가 짐짓 온전히 참되는 것이라, 온전하고 참된 것이 서로 건네면 가히 장구(長久)하나니, 하늘이 그 참됨을 얻었으므로 길고 땅이 그 참됨을 얻었으므로 오래하고 사람이 그 참됨을 얻었으므로 수(壽)하나니, 세상 사람이 능히 장구(長久)하지 못한 것은 그 상 없는 것을 잃어버리며 그 체 없는 것을 흩어서 능히 백해(百骸)와 구규(九竅)로 하여금 참 체로 더불어 아울러 보존하지 못하므로 죽느니라.
또는 선인(先人)이 생(生)하되 생함이 얼굴이 없으며, 후천이 존(存)하되 존함이 체(體)가 없느니라. 그러나 체가 없고 보면 일찍이 있지를 않나니, 그러므로 가히 사의로써 생각하고 의논하지 못하느니라.
고요한 것이 성정이 됨에 마음이 그 가운데 있으며 움직인 것이 마음이 됨에 성정이 그 가운데 있으니, 마음이 생하면 성정이 멸하고 성정이 나타나면 마음이 멸하나니, 성정이 나타나면 허공과 같이 형상이 없어서 담연히 원만 하느니라.
큰 도가 형상이 없으므로 밖으로 그 마음이 나지 않아서 여여자연하고 넓어서 갓과 지음이 없으므로 경계를 대하여도 경계를 잊어버려서, 여섯 도적(盜賊)마(魔)에 잠기지 않으며 티끌에 거(居)해도 티끌을 벗어나서 일만 인연 화하는 데에 떨어지지 아니하여, 정(靜)한데 이르러 동하지 아니하며 화한데 이르러 옮기지 아니하면, 지혜가 시방에 비쳐서 허(虛)한 변화가 한량없으리라.
제8장 총명강요(總明綱要)
대범 수양 입정의 공부는 그 법이 하나가 아니니, 외수양법(外修養法)이 있고 내수양법(內修養法)이 있으며, 외정정법(外定靜法)이 있고 내정정법(內定靜法)이 있나니, 공부하는 사람은 능히 여러 법을 통관(洞觀)하여 방편에 맞게 쓴 후에 가히 결함 없는 것으로 시작하여 큰 성공을 얻을 것이니라.
또한 자성의 정과 소승의 정과 대승의 정이 있으니, 이에 역시 밝게 판단하여 잘 고찰한 후에 가히 그릇됨이 없는 것으로 시작하여 바른 정(定)을 얻으라. 이것이 이 수양의 도이니라. 이치가 법이 많으니, 말은 비록 다르나 뜻은 모두 같은 것이라 만약 그 강요를 잘 알지 못하면 집착에 빠질까 우려하노라. 편벽된 수행이 병통이므로 다시 이 책의 전편의 모든 뜻을 별도로 간단하게 밝힌 것이다.
외수양(外修養)이라고 하는 것은, 그 수양의 의지가 외경(外境)을 대치(對治)하는 데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외경을 대치한다는 것은,
첫째는 피경(避境)공부이니, 처음 공부를 할 때에 마땅히 밖에서 유혹하는 경계를 멀리 피해야 하는 것이요,
둘째는 사사(捨事)공부이니, 긴요하지 않은 일과 너무 번잡한 일은 마땅히 놓아버리고 짓지 말아야 하는 것이요,
셋째는 의법(依法)공부이니, 상승 해탈의 법을 믿어 받들어 진리로 안심을 구하는 것이요,
넷째는 다문(多聞)공부이니, 위인들의 관대한 실화를 많이 들어 항상 국량을 크게 하는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공부를 하여갈 즈음에 이 네 가지 일을 행하면 자연히 외경이 평정(平定)하여져서 방해하는 마음의 폐단이 없으리라.
옛 말에 이르기를,“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하였으니, 바람은 곧 외경이니라. 바람이 그친 즉 나무가 고요하고, 경계를 다스린즉 마음이 안정되는 것이니라.
내수양(內修養)이라고 하는 것은, 수양의 뜻이 안으로 닦아 쉬어버리는 데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안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닦는 것은,
첫째, 집심(執心)공부이니, 염불 좌선을 할 때와 일체의 때 가운데 항상 마음을 잘 붙잡아 동하지 아니하고 나의 마음과 정신으로 하여금 밖의 경계에 흐르지 않게 놓아버리지 않는 것이니, 소를 길들이는 사람이 고삐를 단단히 잡고 놓지 않은 것과 같으니라.
둘째, 관심(觀心)공부이니, 집심공부가 점차 익숙해지면 혹은 방임 자적(自適)하면서 다만 마음이 가는 것을 보아 그 망념만을 제재(制裁)하는 것이니, 마치 소를 길들이는 사람이 고삐를 놓고 소를 보되 다만 어지럽게 다니는 것을 제재하는 것과 같은 것이요,
셋째, 무심(無心)공부이니, 관심공부가 이미 순숙되면 혹은 본다는 상도 놓아서 서로 밝고 고요하게 자재함에 맡겨보는 것이니, 마치 소를 길들이는 사람이 사람과 소가 둘이 아닌 지경에 처음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동과 정이 한가지로 참되느니라.
경에 이르시기를,“마음이 청정(淸淨)하면 일체가 다 청정하여, 마음이란 것이 허공과 만상을 포함하였다.”고 하셨거니와, 한 마음이 청정하면 백 천 외경이 다 청정하여 경계와 내가 사이가 없이 한가지로 정토(淨土)를 이루리라.
외정정(外定靜)이라고 하는 것은, 정정(定靜)의 뜻이 입지(立志)가 흔들리지 아니한 데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입지가 부동하다는 것은,
첫째는 큰 서원을 발하는 것이니, 서원이 지극하면 천만 가지 세상의 인연이 앞에 가로 놓여 있어도 보되 보이지 않고 마음에 조금도 걸림이 없는 것이니, 마치 석가세존께서 대도에 발심하여 왕궁의 쾌락과 설산(雪山)의 고(苦)가 마음과 사상(思想)에 머물지 않음과 같은 것이요,
둘째는 큰 신심을 발하는 것이니, 신심이 지극하면 천만 세간의 법이 비록 분운(紛紜)한 곳에 아울러 처하여도 다시 사량과 취사하는 분별심이 없는 것이니, 마치 혜가(慧可)가 달마에게 한번 믿고 뜻을 결정하여 몸을 잊고 법을 구하는 사상과 같은 것이요,
셋째는 큰 분심을 발하는 것이니, 분심이 지극하면 천만 장애가 비록 포위 중첩하여도 두려워하고 물러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니, 마치 예수의 십이사도가 위험을 무릅쓰고 도를 지키며 죽어도 마지않는 사상과 같은 것이니라.
그러므로 공부를 할 즈음에 이 세 가지 사상이 있으면 자연히 입지가 태산 같아서 흔들림이 없으리라.(특별히 세존과 혜가와 십이사도를 드는 것은 다만 한 예를 들어 말한 것이고, 모든 성현들의 능히 도문에 들어간 것은 모두 다 이러한 심사(心思)이며, 또한 표현은 서로 다르지만 실행의 결과는 하나이며 근본 사상도 하나로 같으니라.)
내정정(內定靜)이라 하는 것은, 정정의 뜻이 안으로 마음에 요란함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첫째는 염불과 좌선을 할 때에나 또는 일체 일이 없을 때에 요란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요, 분별에 일어나는 때에 이르러 분별이 그쳐서 적요(寂寥)하게 한 생각도 없어서 맛도 잊고 형체도 잊어 일념을 기르는 것이요,
둘째는 행주 동작과 내지 일체 일이 있을 때에 그 뜻이 올발라서 비록 찰라 간이라도 망념이 동하지 않게 하는 것이니, 옛 성인이 말씀하신‘일직심一直心’이 이것이요,
셋째는 사상(四相)이 공하고 육진(六塵)이 몰록 정결하여 경계를 대하되 경계를 잊고 착도 없고 물듦도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이 마땅히 행하여도 행하는 바가 없고 동하여도 동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이것이니라.
그러므로 공부를 할 즈음에 이 세 가지 힘을 얻으면 자연히 마음 바다가 평정하여지고 번뇌가 영원히 끊어지느니라. 또는 밖에서 도를 구하는 자는 그자성이 원래 정(淨)하고 정혜(定慧) 인연을 알지 못하고 혹 삿된 생각으로 원을 일으키고 혹 기이한데 의지하여 법을 믿고 혹 밖으로 꾸미는 것으로써 도를 구하며, 안으로 닦지 아니하고 밖으로 신통에 마음을 두어 주문을 외고 명상에 고집 불변하여 오래오래 성숙(成熟)하면 또한 정의 도에 들어가기 어려우니라.
그러나 만약 정(定)을 닦는 가운데 이적이 조금이라도 나타나면 마음이 황홀(怳惚)하여지고 혜가 조금 발하면 더욱 번창하여 정(定)이 다시 요란해지고 또한 삿된 행동으로 죄를 짓는 자가 매우 많으니, 자성의 정은 먼저 자성이 원래 고요함을 알아 정혜인연으로 이에 의지하여 수행하면 공과 색이 둘이 아니고 동과 정이 하나이고 원망과 친함이 평등하고 선악의 성이 공하며 생로병사와 일체의 인과에 조금도 걸리고 막힘이 없이 여여 자연하여 망념을 영원히 멸하여 성품의 체가 항상 나타나나니, 비하건대 풀을 뽑는 사람이 풀의 뿌리를 제거하여 다시는 싹이 나지 않도록 하는 것과 같으니라.
소승의 정(定)은 독선적이어서 중생을 제도할 생각은 하지 않고 편벽되이 작은 법을 구하고 다만 무사안일만을 취하며 혹은 세속과 처자를 피해 산속으로 들어가 종신토록 보고 듣는 것이 없는 것으로 스스로 정결한 것을 삼으며, 혹은 경계를 피하고 홀로 처하여 종신토록 일 없이 지내며 이렇게 스스로 생각 생각이 부지런히 닦고 세속에 물들지 않으며 참 정을 이루고자 하지만, 그러나 만약 세속을 떠나 사물을 응하고 순역간의 모든 경계를 포위하고 공격하면 창황(愴惶) 간에 바름을 잃고 마나니, 비유하면 작은 그릇의 물을 비록 맑히고자 하나 도리어 오염시키는 격이니라.
대승의 정은 대도를 믿고 받들며 중생을 제도하기로 서원하여, 정을 시끄러운 데에서 익히고 고에서 편안함을 구하며 일이 있는 가운데에서 일 없음을 취하고 욕심 경계에서 무욕을 구하며 인욕 정진하여 화하되 흐르지 않는 데에 이르러, 희로애락과 사랑하고 미워함과 좋고 나쁨을 임의로 자재하여, 동하되 고요함을 떠나지 아니하고 정하되 동을 떠나지 아니하면 동과 정이 항상 편안하리니, 비유하여 말하면 대해의 물이 크고 넓어서 맑히고자 하나 맑힐 수 없고 탁하게 하고자 하나 탁하게 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라. 수도하는 사람은 능히 모든 법을 잘 이해하고 근기를 따라 밝게 통찰하여 매하지 않으면 수행하는 가운데 비록 미혹과 장애가 있더라도 벌어지지 않으리라.
이 책의 모든 편의 말씀을 종횡으로 흐르도록 통하여 비록 여러 가지 방편이 있으나, 그 본의는 다만 수양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라. 수양의 수(修)는 덕을 왕성하게 기르는 것이니라. 지혜와 총명은 이로 말미암아 기초가 되고, 솔성과 실행은 이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며, 신통과 묘술이 이로 말미암아 생기고, 생사 해탈이 이로 말미암아 얻어지고, 육도를 자유함도 이로 말미암아 근원이 되느니라. 대범 수행하는 사람은 부지런하고 또 부지런할 지어다.
정정요론(수심정경)에 대한 이해
정정요론(定靜要論)은 원기 12년 5월에 발간된 수양연구요론에 상하로 나뉘어 1장과 2장으로 수록된 내용이다. 수양연구요론은 원기 12년 3월에 불법연구회 규약이라는 최초의 교서가 나온 지 두 달 만에 발간된 것으로 소태산(少太山) 술(述)로 발간된 교단 최초의 활자본 교서이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그 서문에“본서는 가장 간명히 수양의 본원을 알리기 위하여 정정요론을 말하고, 연구의 방편을 밝히기 위하여 삼강령 팔조목과 각 문목순서 등을 설명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수양연구요론은 이공주(李共株)종사의 후원으로 출간되었는데, 이 책의 발간을 위해 대종사께서 직접 상경하여 친감(親鑑)하실 정도로 정성을 드렸으며, 교단 최초로 소태산 대종사의 30대 중반 삭발한 흰색 두루마리 차림의 모습을 사진으로 싣는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불법연구회 규약>과는 성격이 다른 실질적으로 최초의 교서이기 때문이다. 편집 겸 발행인 이경길(李瓊吉)은 이공주 종사의 호적명이다. 이름 가운데 경(瓊)은 옥, 또는 옥의 아름다운 빛깔이란 의미로, 법명의 구슬 주(珠) 자(字)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수양연구요론은 약 5년 동안 기본 교서역할을 하다가, 원기 17년(1932) 4월에 드디어 국한문 혼용체의 『보경 육대요령(寶經 六大要領)』이 발간되고, 한 달 뒤에 한글 전용 판이 나왔다.『보경 육대요령(寶經 六大要領)』이 발간 된지 2년 8개월 뒤인 원기 19년(1934) 12월에 이를 간추린『보경 삼대요령』이 발간되어, 두 교서는 대종사 열반 때 까지 교단의 중추적인 교리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수양연구요론에 술(述)이라는 단어는‘짓다’,‘글로 표현하다’,‘말하다’,‘설명하다’,‘해석하다’ 등의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경우처럼 술(述)을‘지음’이라는 개념으로만 파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정정요론은 비전(秘傳)의 선서(仙書)인 정심요결(正心要訣)을 해석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심요결은 정산(鼎山)종사께서 대종사를 만나기 전 18세(1917년) 때에 정읍 덕천면 신월리 두승산 시루봉 아래의 손바래기 마을에 있는 증산(甑山)의 본가(本家)에서 증산의 무남독녀 외딸인‘강순임’(당시 16세경)으로부터 입수한 책이다.
원래의 책명은『영보국 정정편(靈寶局定靜篇)』으로, 나중에 정산이 봉래산에서 대종사께 올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며, 증산교파의 하나인 삼덕교(三德敎)의 수련교서이다.『영보국 정정편(靈寶局定靜篇)』은 삼덕교의『생화정경(生化正經)』 부편에 실려 있는데, 이 책은 증산에 의해 이옥포(李玉圃)에게 전해졌고, 다시 이치복과 김형국에게 전해져서 보성 득량의 허욱(許昱)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이옥포는 부안 사람으로 선천 음양학술에 정통하였다고 한다. 허욱은 이 책을 읽고 7일 만에 통령(通靈)하여 삼덕교를 창설했다. 삼덕교는 나중에 단군정신선양회(檀君情神宣揚會)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미루어 보면, 일설(一說)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서(秘書)를 증산이 딸에게 비밀히 전하면서,“이 책은 나중에 주인이 나타날 것이니, 잘 보관하였다가 그 사람이 나타나면 내어 주라,”고 하여, 딸 순임이가 이를 깊숙이 보관하였다가, 정산이 18세 무렵에 찾아와 머무르는 동안 오빠처럼 따르며 살펴보니,‘바로 이 분이 아버님이 말씀하신 그 분’이라는 확신을 얻어 정산에게 주었다는 설은 신빙성이 떨어져 보인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미 여러 사람들에게 전하여 졌고, 삼덕교에서 이를 수련교서로 삼았기 때문이다.
『정정요론』의 저본은 정산종사의 외사촌인 훈산 이춘풍이 순 한문으로 된『정심요결』을 번역한『정심요결 번역』본이다.『정심요결』은『영보국 정정편』과『도설(道說) 상중하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도설(道說)은 정통도장(正統道藏)의 내단수련서(內丹修練書)『정관경(定觀經)』,『상청정경(上淸定經)』,『통고경(通古經)』,『대통경(大通經)』 등 여러 경서(經書)를 합편한 것이다.
이러한 정정요론은 대종사 봉래산 수양 시 부터 제자들에게 회람되면서 보급되다가, 원기 12년에 <수양연구요론>에 번역본이 보입(補入)되면서 정식으로 교서로 자리매김하였다. 수심정경(修心正經)은 바로 정정요론을 정산종사가 보완 증편한 것으로, 중앙선원에서 원기 39년(1954) 동선(冬禪) 때에 순 한문으로 발간하여 교무들과 선학원생들의 교재로 활용했다. 본래는 편장(篇章)의 구분이 없던 것을 정산종사가 이를 부분적으로 가감 보완하면서 7장으로 정리하였고, 마지막 제8장 총명강요(總明綱要)는 정산종사가 새로 지어 붙인 것이다.
제8장 총명강요는 앞의 7장까지의 내용에 대한 총체적인 결론 부분으로 이해하면 되며, 구체적인 수행의 방법을 강령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정정요론을 완결한 의의를 갖는다. 제8장 총명강요의 내용은『정산종사법어』제6 경의편(經義篇) 65장과 66장에 부분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대략 수심정경의 강령으로써 외수양(外修養)과 내수양(內修養)을 밝히고, 외수양(外修養) 공부법으로 ①피경(避境)공부 ②사사(捨事)공부 ③의법(依法)공부 ④다문(多聞)공부 네 가지를 밝혔고, 내수양(內修養) 공부법으로 ①집심(執心)공부 ②관심(觀心)공부 ③무심(無心)공부 이 세 가지를 밝혔다.(경의편 65장)
또한 외정정(外定靜)과 내정정(內定靜)을 밝히고, 외정정(外定靜) 공부법으로 ①큰 원(願)을 발함. ②큰 신심을 발함. ③큰 분심(忿心)을 발함. 이 세 가지를 밝히고, 내정정(內定靜) 공부법으로 또한 세 가지 방법을 자상히 밝혔다.(경의편 66장) 따라서 이 책의 내용은 엄밀히 말하면 정정요론과 수심정경을 합본한 것이다.
정정요론은 이렇게 초기 교단의 교리 형성에 영향을 미쳐, 삼학 수행은 물론, 신.분.의.성과 불.신.탐욕.나.우 등 팔조(八條)와, 좌선법, 그리고 일부 내용은 참회문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이 인용되었다.
<참고문헌>
『원불교 초기교서』, 원불교 자료실편, 원광대학교 중앙도서관, 총장 송천은 발행 同원불교 자료실 박용덕지음, 원광대학교 출판국, 1997.
『원불교 전서』정산종사법어, 원불교 정화사 편찬, 원불교 출판사, 1977.
『원불교 교고총간』(영인본) 초기교서편, 원불교 출판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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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명정정대지(明定靜大旨)
무릇 수양을 하는 사람은 그 망념을 닦고 그 진성을 기르는 것이니, 성품을 기르는 공부는 정정으로써 본을 삼아야 하리라. 정정(定靜)의 공부법은 지극히 넓고 지극히 큰 서원을 품음으로서, 지극한 정성과 지극한 믿음을 발하여 생각과 생각을 잊어버리지 아니한즉 정하고 고요함을 가히 얻으리라.
정(定)이란 것은 하나로 이에 정하여 모든 다른 도리가 나의 짓는 바에 더함이 없고, 저 허다한 법술(法術)이 세상을 의혹케 하는 데에 빠지지 아니할 뿐이다. 정(靜)이란 것은 하나로 정(定)한데 돌아와서 다시 다른 데로 움직이지 아니하여, 부귀영화도 능히 마음을 달래어 가지 못하고 금옥 보패도 가히 뜻을 뺏어가지 못할지니, 한 뜻이 정하는 데에 서 있음에 다섯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한 즉 맹자(孟子)의‘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한 것’과, 노자(老子)의‘근본에 돌아와 고요하다’함이 다 이 정정(定靜)을 이름이니라.
위로 색지경(色至境)이 없고 아래로 욕심 바다가 없어서, 한 생각으로 일만 년이 가면 귀와 눈이 한가지로 맑고, 몸과 마음이 한가지로 잊어버리고, 정신과 기운이 한가지로 서늘하고, 안과 밖이 한가지로 공(空)하여〔적적(寂寂)하고 고요한데 깊이 빠져 정(定)하고 담연(湛然)함이 하나에 이르러서, 먼저 나의 한 마음 하늘을 온전히 한 뒤에〕정신 기운이 냉랭(冷冷)하여 맑고, 정신 빛이 형형(炯炯)하게 밝아서 비치지 아니한 땅이 없고 통하지 아니한 이치가 없느니라. 그러나 만약 시끄럽게 움직인즉 정신 기운이 몽몽(懵懵)하게 어둡고 정신 빛이 암암하게 어둡나니, 어찌 생각하고 생각 두는 바에 유익이 있으리오.
정정(定靜)함이 오직 면면하고 밀밀해서 생각이 잊어버리지 아니한즉 한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하고 일백 맥이 근원에 돌아와서 자연히 불은 내리고 물은 오르며 기운이 정(定)하고 정신이 맑아져서 드디어 큰 광명이 나타남에, 위로 하늘 지경을 통하고 아래로 땅 지경을 달하여 공공(空空)하고 통통(洞洞)함에 광명이 갓이 없고 동하여도 사이가 없어서, 귀신의 지경을 통하여 보고 하늘 문을 사무쳐 여느니라.
제2장 명금기(明禁忌)
공부하는 데에 다섯 가지 꺼리는 것이 있으니,
첫째는 무슨 일이든지 무슨 말이든지 이루기로 하는 곳에 믿지 아니함이요,(不信正法)
둘째는, 정당한 법과 상당(相當)한 일을 만홀(漫忽)히 하여 존중하지 아니함이요,(不謹嚴)
셋째는, 시비를 알지 못하고 자의로만 집착함이요,(執着自意, 不知是非固執自意)
넷째는, 가볍고 흔들려져서 과히 기뻐하고 과히 즐겨하는데 끌림이요,(輕發喜惡)
다섯째는, 먼저하고 뒤에 할 바를 알지 못하고 속히 하고자 하는 마음이니,(生欲速心) 이것이 다 큰 병이라 반드시 사도에 떨어지나니, 공경하고 삼가라.
만약 처음으로 배우는 사람이 고요히 앉음에 반드시 나의 마음이 안정하지 못한 데에 괴로워서 번거하고 잡된 생각을 금하기로 한즉 도리어 잡된 생각이 더 나나니, 오직 너그럽고 부드러움을 주장하여 자연한데 돌아가고 보면 정하고 고요함을 스스로 얻으리라.
비하건대, 탁한 물이 맑아지기를 기다림에 급히 맑히고자하여 자주 상고하고 자주 살핀 즉 흙물이 더욱 일어나는지라, 그러므로『정관경(定觀經)』에 이르기를, 마음 묶기를 가장 급히 하므로 먼저 웃 경계를 하였느니라. 만약 혹 정하지 못하여 악한 경계가 나타나면 마음 돌리기를 민민(泯泯)하게 하고 뜻 구하기를 한한(閒閒)하게 하며, 선생의 가르침과 자기의 원하는 바를 밀밀(密密)하게 생각하면 자연히 정하고 고요하리라.
무릇 공부를 할 즈음에 일만 형상이 삼연(森然)하게 벌이나니, 가히 게을리 하지도 못하며 급히 하지도 못할 것이요 분운한 번화(繁華) 머리가 다 마음 머리를 좇아 나가나니, 일체 이 기이하고, 현수(現殊)하게 드러나고, 승(勝)하고자 하고, 좋아하고, 원망하고, 응(應)하고, 변(變)하는 일이 다 자기 마음 나는 대로 베풀며 자기 마음 구하는 대로 나타나느니라.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 가운데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이 있어서 도심이 인심으로 하여금 끌리고 잡혀서 사사(邪私)한 데에 떨어지게 되면, 바른 마음은 물러가고 간사한 마음이 차차 나나니 어찌 삼가지 아니 하리오. 또 유명(幽冥)한 경계는 다만 나의 한번 생각을 궁굴려 옮기는 곳에 있나니, 번화 머리 베푼 바에 삼가 마음을 부리지 말라. 만약 혹 보이는 것을 보아도 보지 아니한 것과 같이 하여 조금도 마음과 뜻에 걸지 아니 하고, 반드시 한 점 참마음으로써 도리어 현묘한 데에 돌아와서 정성이 지극히 한결같으면 철석이라도 가히 열리고 뼈와 살이 얼굴을 나눈지라.
마음은 일만(一萬) 신령의 주장이 되고 몸은 음양 조화의 집이 되나니, 음부경(陰符經)에 이르기를,“다섯 도적이 없으면 우주가 손에 있고, 일만(一萬) 화(化)가 몸에 난다.”는 것은 이것을 이름이니라. 근래 세상에 수련하는 사람이 왕왕이 외구화식(外具華飾)으로써 생각만 베풀고 주문을 읽으면서 욕심을 품고 공부한다고 일컬으나, 공연히 세월만 헛되이 지내나니 어찌 참 지경에 이르리오. 대개 지극한 도(道)가 깊고 깊으나 그 다른 데에 있지 아니 하느니라.
사람이 능히 도를 넓히면 도가 사람에게 멀지 아니 하나니, 주자(朱子)는 이르기를,“도(道)란 자는 가히 잠깐도 몸에 버리지 못할 것.”이라 하셨고, 자사(子思)는 이르기를,“성품 거느리는 것을 일러 도(道)”라 하셨고, 증자(曾子)는 이르기를,“그칠 바를 안 뒤에 정(定)함이 있으니, 정한 뒤에 능히 고요하고, 고요한 뒤에 능히 편안하고, 편안한 뒤에 능히 생각하고, 생각한 뒤에 능히 얻는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다 스스로 그 밝은 덕(德)을 밝히는 일이니라. 내게 이미 밝은 덕이 있으니 어찌 수련하여 밝히지 아니 하리오. 이 일단사(一段事)는 스스로 밝은 덕을 밝히는 법이니라.
제3장 명련기방법(明鍊氣方法)
무릇 수도를 하는 사람이 만약 수화(水火)의 현묘한 이치와 오행(五行)의 나고 화하는 도를 알지 못하면 한갓 단장하고 꾸미는 아이의 희롱(戱弄)이니라.
대저(大抵) 정정(定靜)하고 수련하는 법은 이에 나의 몸 조화하는 도를 단련하여 진실로 힘써 행하면 마음 불이 아래로 내리고 신경(腎經) 물이 위로 오르나니, 진일(眞一)한 물이 입에 가득하여 달고 윤활하고 향기 나고 맛난 것은 곧 신경(腎經) 가운데 진수(眞水)가 위로 오르는 기별이니라.
감(坎)과 이(离)가 사귀어 통하고, 물과 불이 이미 건넨 뒤에 조화가 다 위로 니환(泥丸)에 조회(朝會)하나니, 나의 한 점 신령한 빛을 운전한즉 화하여 남창상궁(南昌上宮)에 불방울이 되어 위로 니환현궁(泥丸玄宮)을 뚫어서 이마 문(門)이 미미하게 움직이나니, 인(因)하여 정성으로 행한즉 이마 문이 활연하여 처음에는 일만(一萬) 개미가 모이고 모이는 형상과 같아서 심히 가렵고 가려워지나니, 삼가 긁고 만지지 말고 정신과 정신을 이마 위에 모인즉 홀연히 맑은 우뢰(雨雷) 한 소리에 이마 문이 큰 돌이 벌어진 것과 같아서, 한 몸에 일만 신령(神靈)이 다 이 문으로 출입하면 형모(形貌)의 광명이 보름달과 같고 삼계 천진(三界天眞)이 구름같이 니환(泥丸)에 모여, 기뻐하고 즐거워함이 한 몸 지친(至親)과 같나니, 이것은 이에 묵묵히 상제(上帝)님께 조회(朝會)하는 법으로 실상(實相)한 이치이니라.
이 법을 행하는 자는 마땅히 먼저 뜻을 아래 단전(丹田)에 머무르고 담연(湛然)히 오래 앉으매 물과 불이 사귀어 통하여 옥지(玉池)에 물이 나서 입안 가득히 삼켜 내리면 정령(精靈)이 이에 올라서 위로 니환 이마 문에 조회하느니라. 만약 옥지의 물을 삼켜 내리지 아니 하면 다만 불이 올라와서 육신과 정신을 태우느니라. 그러므로 행하고 수련하는 사람이 매일 밤 반(半) 맑은 새벽에 항상 안으로 수련함을 행하여 마음에 불은 내리고 물은 오르는 형상을 생각하고 뜻에 감(坎)과 이(离)가 사귀어 통함을 두면 자연히 물과 불이 서로 순환하여 생각을 오래 궁굴려 온전히 읽히면 정신이 니환에 모이고 불방울이 이마 문에 발하나니, 이것이 도전(道傳)하는 비밀(秘密)함이요, 도(道) 닦는 요긴함이요, 도 깨닫는 참 비결이니라.
먼저 정(定)하고 고요한 법을 행함이 대개 이 일에 말미암을 따름이니, 정하고 고요함이 아니면 물과 불이 오르고 내리지 아니 하므로 이것을 얻는 자는 가히 날을 한정하고 성공하리라.
제4장 명입문요법(明入門要法)
선요(禪要)에 이르기를“큰 요긴함이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크게 믿음이요, 둘은 뜻을 크게 분(忿) 내는 것이요, 셋은 크게 의심(疑心) 내는 것이니, 의심이란 것은 신(信)으로써 체가 되나니, 신이 십 분(十分)이 있으면 의심이 십 분이 있고 깨달음이 십 분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곧 정하고 고요한 빠른 법을 말함이니라. 어찌하여 그러한가? 큰 원(願)이 없으면 지극한 정성이 나지 아니 하고, 큰 의심이 없으면 죽기로써 하는 분이 나지 아니 하고, 큰 신이 없으면 참 의심이 나지 아니 하느니라.
여쭙기를,“어찌하여 원하는 가운데에서 신이 나고 분이 나고 의심이 나고 정성이 나는 것입니까?” 답하여 가로되,“한 하늘 아래에 지극히 묘하고 지극히 보패(寶貝)되고 지극히 착하고 지극히 높은 법은 오직 한 영보진국(靈寶眞局)이라, 영보국(靈寶局)은 사람사람이 각각 몸 안에 품부(稟賦)하여 있나니, 곧 하늘이 명하신 나의 본래성품(本來性品)”이라고 말씀하셨다.
성품을 거느려서 도를 닦고 덕을 밝혀 빛을 발하면 가히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平)하며, 가히 억조(億兆)의 군(君)과 스승이 되며, 가히 한량없이 수(壽)하는 신선(神仙)이 되느니라. 어찌하여 그러한가? 가로되,“하늘이 명하신 덕이 품부(稟賦)가, 사람 될 처음에 머리는 위에 삼청진궁(三淸眞宮)의 기운으로 화하고, 배는 아래 산림천택(山林川澤)의 얼굴을 받고, 가슴은 일월성신(日月星辰)과 풍운우뢰(風雲雨雷)와 음양조화의 부락을 품었나니, 이는 바로 나의 몸에 천진제군(天眞帝君)과 구령삼정(九靈三精)과 오신진군(五神眞君)과 내외장군(內外將軍)과 좌우관속(左右官屬)과 제부공조(諸府工曹)와 및 팔만사천원군(八萬四千元君)이 각각 부락을 의지하여 나뉘었으니, 이것이 이에 영보도국(靈寶道局)이니라.
닦아서 밝은 자는 신선이 되고 성현이 되며, 그 마음을 놓아 버린 자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느니라. 닦아서 밝히고자 하는 자는 큰 원이 아니고 보면 무엇을 하리오. 또 사람사람이 각각 이 영보국이 있으니, 어떠한 사람은 얻으며 어떠한 사람은 얻지 못하는 것인가? 라고 큰 분이 나게 되면“일만 이치가 나에게 갖추고 일만 법이 여기에 갖추었나니, 오직 하나 뿐이거늘 도가 어찌 문이 많으며 오직 하나 뿐이거늘 법이 어찌 길이 많으며, 오직 하나 뿐이거늘 사람이 어찌 많이 구하며 오직 하나 뿐이거늘 내가 어찌 다시 의심하리오.”하고 생각하면 의심이 없어지고 바란 즉 의심이 있나니, 의심이 가고 의심이 옴에 의심할 바가 없거늘 공연히 무엇을 의심하리오. 홀연히 마음 생각을 태워 밝히면 이것이 이에 참 의심이니라. 이 의심 아래에 일만 의심이 고요하고 적적하여 주야를 분간 못하여 꿈도 같고 참도 같아서 텅 비고 적적한 천지에 오직 한 의심뿐이거늘 이것이 큰 의심이 아니고 무엇이리오.
대개 의심 의(疑)자의 공부가 가장 알아 얻기가 어려우니, 만약 크게 믿는 마음이 없으면 참 의심이 나지 아니하므로 선요(禪要)에 이르기를,“신(信)이 십 분이 있으면 의심이 십 분이 있고 깨달음이 십 분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것을 가르쳐 이름이니라. 신(信)함을 가히 신할 것이요 정성함을 가히 정성할 것이니, 신으로써 정(定)하고 고요하며 신으로써 분 내고 의심 내나니, 크게 믿음이 아니면 신이 어찌 장구(長久)하리오. 한 번 정함이 변하지 아니하여 시(始)와 종(終)이 한결같으면 이것을 일러 정성이라 하느니라.
옥경(玉經)에 이르기를,“정성으로써 도에 들어가며, 묵묵함으로써 도를 지키며, 부드러움으로써 도를 쓴 즉, 자타가 한 가지로 잊어버리고 밝은 빛이 이에 나며 성인의 지혜가 스스로 온전하다.”하였고, 또 음부경(陰符經)은 전부 영보(靈寶)의 시와 종을 발하여 가르침이라, 그러므로 이 영보를 수련하는 사람이 음부(陰符)로써 정정(定靜)의 원경(元經)을 삼아서 밖으로 외우고 생각하며, 안으로 정하고 고요하면 이것이 영보의 시와 종이 다 음부 三편에 있으므로 옛 법을 영보에 전함이니라.
본래 문자(文字)가 없고 다만 구결(口訣)로만 음부를 줄 뿐이라, 그러므로 영보의 참 도를 아는 자가 드문지라, 이제 이미 문자가 있고 또 가령(假令)을 기록하였으니 어찌 화창하게 밝히지 아니하리오. 다시 선현의 수련하는 지도(指導) 문자(文字)에 더하여 앞으로 오는 학도(學徒)의 도 배우는 마음을 열리게 하나니, 또한 가히 이르되 수련하는 공부에 일조가 되니 마음을 씻고 새로이 읽을 것이니라.
옛적에 서봉도사(西峰道師)가 학도에게 이르시기를,“천하에 주인 없는 한 집이 있으니 이것이 영보국이라, 그 가운데 천하 무궁한 묘함과 무궁한 보패와 무궁한 재물을 감추어 놓고 팔만 사천 문로(門路)를 통하여 열어 놓고, 담과 담을 둘러쌓고 욕심 있는 자와 게으른 자와 어리석은 자와 불신하는 자로써 각각 여러 문로를 지키라.”하고 명령하기를,‘탐하고 욕심 있고 게으르고 어리석고 불신하는 자가 와서 이르면 너희 등이 각각 지켜서 단단히 막고, 비록 아무라도 정성 있고 믿음 있고 온전하고 한결 된 자가 와서 이르면 문을 열어 들이어서 빈집 주인을 삼아 무궁한 재물과 보패를 허락하여주라.’이르니, 세상 사람이 다 이 말을 듣고 웃으면서 버리고 취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이러한 재물과 보패를 내가 어찌 감히 취하리오. 이것은 복 있고 인연 있는 자가 마땅히 취할 바이라.’하여 감히 가서 구하지 아니 하니, 석가(釋迦)가 말을 전하시고 노자(老子)는 길을 가르치시고 공자(孔子)는 권하여 보냈으나 또한 나아가 취하지 아니 하고, 혹 가는 자는 불신이 있어서 막아 받지 아니 하고, 또한 탐욕 있고 나태하고 어리석은 자도 막아서 안으로 들이지 아니 하나니, 그 사이에 능히 들어가 취하는 자는 오직 천만 사람 가운데에 한 두 사람뿐이요, 그 나머지는 불신하고 욕심 있고 게으르고 어리석은 자이라.
슬프다! 이 세상 사람들이여! 넓고 편안한 집을 거하지 아니 하고, 바른 길을 놓고 가지 아니 하고, 모두들 사람의 재산을 도적질하고, 혹 부자의 남은 재물을 빌고, 혹 길가는 사람의 로비(路費)를 빼앗고, 혹 벽을 뚫고, 혹 속여 취하고, 혹 기한(飢寒)하고, 혹 다투고 싸움하여 다섯 도적이 아울러 일어나고 세 도적이 쉬지 아니하여 천하가 크게 요란하니, 법관이 형벌을 쓰고 친한 벗이라도 또한 비방하고 사람의 유(類)에 들지 못하게 하나니 가히 일러 한심할 곳이라.
그 사람의 하는 바는 마땅히 취하지 아니할 바를 취하여 말하기를,‘내가 빠른 법을 행하여 쉽게 취하고 쉽게 얻는다.’하여 혹 죽고 혹 패함에 괴로움을 받아도 후회할 줄 모르고 도리어 지리(支離)함을 보니, 이것이 어리석은 것인가 게으른 것인가? 공자의 이른바 분토(糞土)의 담장이요, 맹자의 이른바 하우(下愚)에 옮기지 아니한 자가 이것이 그 무리들이니라.
선서(禪書)에 이르기를,“능히 여러 문 가운데에 한 문을 열고 들어가서 무궁하게 갊은 보패를 취하여 써도 다함이 없고 취하여도 금하는 자가 없으니, 이 보패가 밖으로부터 오는 물건이 아니요 이것이 집안에서 나고 나는 무궁한 물건이니라.
능히 당(堂)에 오른 자는 정성이요 능히 문을 여는 자는 의심이요 능히 물건을 주장하는 자는 신이요 의리에 다른 사람의 재물과 보패를 취하지 아니 하고 마땅히 취할 물건을 취하는 자는 분(忿)이니라. 만약 신과 분과 의 세 글자가 없다면 담 밖에 반환(盤桓)하고 처마 앞에 두류(逗遛)하여 세월을 만연(挽連)하여 지냄에 공연히 기운 힘을 허비하다가 한심하고 물러가서 이에 돌아다니며 얻어먹는 사람이 되느니라.
그러므로 비유하여 이르기를,“돌 가운데 갊은 옥은 철정(鐵釘)이 아니면 캐지 못하고, 여석(礪石)이 아니면 갈지 못한다.”하였고, 또 이르기를“범의 소굴에 들어가지 아니 하면 어찌 범의 자식을 얻으리오.”하였으니, 철정은 신심을 말함이요 여석은 의심을 말함이요, 범의 소굴에 들어가는 것은 분심을 말함이니, 캐고 갈고 범의 자식을 얻고자 하는 자는 큰 분을 용맹 있게 발하여 금강리(金剛利)같은 예리한 칼로 세상 모든 인연을 끊고 큰 의심을 발하여 요망한 마음과 번거한 뜻을 곧 죽여 없애고 큰 신을 품어서 능히 이 문에 들어온 연후에야 철주(鐵柱)의 중심이 되고 석벽(石壁)의 외면이 되어, 천만 스승의 말이라도 다시 이 말보다 더 묘함이 없고, 묘한 도와 현현(玄玄)한 이치가 또 이 도에 더함이 없으며, 또 눈에 좋게 보이는 바가 없으며, 귀에 기꺼이 들리는 바가 없으며, 묘함이 다른 묘함이 없으며, 보패가 다른 보패가 없으니, 한 마음이 정하고 고요함에 탕탕(蕩蕩)하고 활활(豁豁)하여 작은 먼지만한 것도 어리고 막힘이 없으니, 사람이 처음 태어난 것과 같아서 차(茶)를 마셔도 차인지 알지 못하고 밥을 먹어도 밥인지 알지 못하고 행하여도 행하는 줄 알지 못하고 앉아도 앉았는지 알지 못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서, 정의(情意)와 식심(識心)이 돈연(頓然)히 끊어지고 계교가 도무지 잊어 버려서 기운과 호흡은 있으나 죽은 사람과 같고 또는 허수아비나 흙으로 만든 사람 형상과 같나니 이것은 정(靜)에 잠겼을 때를 이름이요, 정에 잠겼다가 홀연히 기운이 발하여 정신이 동한즉 잠을 곤히 자다가 잠을 깬 것과 같아서, 모든 일에 종(宗)이 없고 차서를 차리지 못하므로 무엇이나 대질리는 곳이 서로 어긋나고 어긋나나니 이것은 정에 잠겼다가 정을 깨쳐 나오는 형상을 이름이요, 정을 깨쳐 마음이 차차 밝아진즉 마음 빛이 돈연히 발하여 시방에 통연(洞然)함에 태양빛이 하늘에 밝은 것과 같고 명경(明鏡)이 대(臺)에 당한 것과 같아서 무엇이든지 한 생각에 넘지 아니하여 동연히 밝게 깨달음을 이루나니, 이 지경에 이른 자는 불가의 부처요 영보국의 성현이요 선가의 신령한 단(丹)이니라.
그러나 만약 신분의성이 지극하지 못하면 팔만 사천 마희(魔戱)군사가 육근 문머리에 엿보고 있다가 기틀을 따라 마음을 달래어가고 백방으로 조화를 지어서 사면(四面)의 번화(繁華) 머리에 심신(心神)을 괴롭게 하고 시끄럽게 하나니, 그럴 때에는 곧 성현의 가르침과 자기 공부하는 본의를 생각하며, 또 요긴한 방법은 무심하기를 주장하고 정력을 더하여 날을 한정한 공부에 나아가며, 비하건대 나의 몸으로 하여금 천척정저(千尺井底)와에 떨어진 형상과 같이 하여, 아침으로부터 저녁때에 이르고 저녁때로부터 아침에 이르기까지 일천 번 생각하고 일만 번 생각하는 것이 결단코 오직 빠져나오기를 구하는 마음이요 결단코 두 마음이 없어서 진실로 능히 이와 같이 한다면 공부 베풀기를 날을 한정하고 가히 기약하리라.
이 말은 곧 상화(相火)와 허화(虛火)가 있고 강기(强氣) 있고 건장한 사람이라야 마땅히 취할 바이요, 또 만약 유온(柔溫)하고 기약(氣弱)한 사람인즉 나의 몸이 죽을 죄에 당함으로 깊이 옥(獄) 가운데에 갇혀서 날을 한정하고 베이어 죽을 차(次)에, 사면을 수직(守直)하다가 홀연히 옥졸(獄卒)이 취하여 잠들 때를 당하니 때에 밤이 적적하고 고요할 때에 수갑을 풀고 잠긴 쇠를 부수고 옥을 넘어 몸을 벗어난즉 동서를 분간하지 못하고 곧 도망하여 지경을 나갈 즈음에, 독한 룡(龍)과 모진 짐승이 앞에 당하여도 두려운 마음이 없고 화살과 돌과 칼과 창도 또한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없어서 빨리 달아나기를 무릅쓰고 기구(崎嶇)히 험한 길을 평지같이 밟으며 가시덤불을 초개같이 보나니, 이것이 어떠한 연고인가 하면, 차라리 다른 데에서 죽을지언정 이 옥 가운데에서는 죽지 아니할 뜻이니라. 이것은 이에 극절한 마음이니 공부할 즈음에 이 간절한 마음이 있으면 날을 한정하고 할 공부요 일백 번이라도 마치는 공부니라.
그러나 이 극절한 말은 공부해 나가는 길과 큰 취미를 얻은 사람이 자연히 행하는 법이요, 사람마다 취하고 사람마다 행하는 법은 아니니라. 누구를 물론하고 공부의 길을 자상히 알며 큰 취미를 얻는 사람은 자연히 그리 되나니, 그 길과 맛을 알기로 하면 위태한 마음을 편안히 하고 선인(先人)의 가르침을 잊어버리지 말고 생각이 전일하면 정정(定靜)을 가히 얻을 것이요 극절한 공부에 나아가느니라.
제5장 명풍토이화지공(明風土移化之功)
정정을 얻은 후에는 미미하게 피어나는 광명이 날로 돋우나니, 오직 정(精)하고 오직 하나라야 진실로 그 가운데를 잡을 것이요, 반드시 가운데에 떳떳하면 중용(中庸)이요 대체를 배우면 대학(大學)이요 도리를 의논하면 논어(論語)라, 원형이정(元亨利貞)과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성품을 따라 느껴 나타나나니 혹 성인과 현인이 곧 풍토의 품수(稟受)는 스스로 다르나 기운 바탕은 같은 자이니라.
그러나 이 나의 영보 참 비결은 사람을 잘 화하게 하는 자이니, 많이 정정편(定靜篇)을 외우고 음부의 뜻을 보존하여 생각하고, 기운을 수련하여 물과 불을 운전하면 풍토를 가히 옮길 것이요 참된 데에 돌아와 착한 데에 밝아서 삼재(三才)에 참예하고 일만 번 화하는 데에 남에 성인과 내가 더불어 같으리라. 성현의 수련하는 법이 다시 이 외에 더 요긴함이 없고 부처와 보살도 다 이와 같이 수련하였으니 이와 같이 수련하는 자는 서로 같으리라.
공부하는 사람마다 이대로 어긋남이 없으면 별로 더디고 속할 것도 없고 먼저 하고 뒤에 함도 없으므로 공부의 대기한은 10년을 한정하면 무불관통(無不貫通)인데 10년 내에 매년 입선기한은 혹 90일로 정하여 2회도 하고, 혹 50일로 정하여 4회도 하는 가운데, 도를 깨는 때에는 정에 잠긴 3일 후에 깨기도 하고 혹 5일 후에 깨기도 하고 혹 7일 후에 깨기도 하고 혹 반시 내에 깨기도 하나니, 공부 한정이 빠르기로 하면 빠르고 멀기로 하면 먼 것이 다 지극히 정성하는 데에 있느니라.
공부하는 사람이 도 깨치기가 더디고 어려운 데로 보면 천년 눈먼 거북이 만리성에 몸을 벗어나기와 같고 3일이나 굽은 바늘로 작은 겨자씨를 던져 뚫기와 같고, 쉬운 데로 보면 지속(遲速)은 물론하고 공부하는데 다른 수고가 더 있는 것이 아니라 공부가 순숙되도록 몸과 마음이 점점 한가해지며, 천척정저에 떨어졌던 사람이 평지에 나온 것과 같고 옥에 갇혔던 사람이 옥 밖에 나온 것과 같은데, 무엇을 인하여 지속을 말하며 되고 안 되는 말을 하리오.
도를 배워 가는 사람이 급속하고 위태한 마음을 차차 경계하여 천인(天人)을 원하여 배우고 다른 사사한 도에 뜻을 망령되게 말고, 하나로 나의 영보국 중에 나아가서 스스로 밝히면 가히 신선도 되고 가히 부처도 되고 진인도 될 것이니, 도문의 모든 학도는 많이 이 책을 외우면 기운이 화하고 정신이 화하여 가히 정하고 고요함을 얻으리니 닦아 밝혀서 이에 그 성품을 회복하는 것이 가할지니라.
제6장 명정정차제(明定靜次第)
세존이 좌현진인(左玄眞人)에게 말씀하시기를,“대범 도를 닦고자 할진대 먼저 능히 번거한 일을 놓아버릴 것이니라. 밖으로 번거한 일이 모두 다 끊어지고 마음에 젖은 바가 없는 연후에 편히 앉아서 안으로 마음 일어남을 보는 자가 한 생각 일어남을 깨워서, 이에 세속 인연과 좋은 낙을 제거하고 멸한 후에 안정하기를 힘쓸 것이니라.
그 다음에는 비록 적실히 탐하고 착(着)함이 없다고 하나, 부유난상이라도 또한 다 멸하여 제거하고 주야 근행하여 잠깐이라도 떠나지 아니할 것이니라. 오직 번뇌와 망상은 멸할 것이요 대중 잡는 마음은 멸하지 아니하며 다만 비우는 데에 마음을 어릴 것이요 주착하는 데에 마음을 어리지 아니할 것이니라. 또는 하나라고 하는 데에도 의지하지 않는 것이 마음의 떳떳한 것이니라. 만일 주하면 마음이 조급해져서 다투고 다투며 번거한 생각이 더 일어나느니라. 또는 처음으로 배움에 마음 붙잡기가 심히 어려우니 혹 붙잡아도 붙잡지 못하여서 잠깐 머물렀다가 도로 잃어버리느니라.
그러나 마음 붙잡을 때에 가고 머무는 것이 사귀어 싸움에 백체(百軆)가 유행(流行)하여 오래 오래 싸우는 정신을 놓지 아니 하면 바야흐로 이에 조숙(調熟)하나니, 잠깐도 마음을 붙잡지 못한다고 근심하지 말고 다만 일천 가지 일 생기는 근원을 없앨 것이라, 차차 마음이 밝아진즉 행하고 서고 앉고 누울 때와 일을 건넬 곳과 시끄럽고 고요한 곳에 다만 편안하기만 주장하며, 일이 있든지 일이 없든지 항상 무심하기를 주장하며, 고요한 데에 처하든지 시끄러운 데에 처하든지 다만 뜻만 오직 한결같이 할 것이니라. 만일 마음 정(定)하기를 가장 급히 하면 곧 병이 생겨서 기운이 발하여 미쳐 엎어지나니, 이것이 그 급한 마음으로 일어난 병이니 그리 알라.
학도자(學徒者)가 만일 마음을 붙잡아서 동하지 아니 하면 또한 희로애락에 놓아 맡겨볼 것이니라. 그리하면 넉넉하고 급함이 곳을 얻어서 자연히 항상 골라 맞으며, 마음을 써도 착함이 없으며, 놓아도 동하지 않으며, 시끄러운 데에 처해도 악한 마음이 없으며, 일을 건네도 번뇌심이 없는 자가 이것이 참 진정(眞定)이라, 일을 건네지 아니 하면 번뇌가 일어나지 아니 하므로 일이 많음을 구하며, 시끄러운 처소를 당하지 아니 하면 악한 마음이 나지 않으므로 강연히 시끄러운 처소에 가보느니라.
일 없는 것으로써 참 성정(性靜)을 삼고, 일 있는 것으로써 응하는 자취를 삼느니라. 이대로 하면 물과 명경으로 햇빛을 대한 것과 같아서 물건을 따라 얼굴을 나타내느니라.
선하고 교교한 방편이 오직 능히 정에만 들어가게 하는 것이요, 지혜 발함의 더디고 속함이라 하는 것이 사람에게 말미암지 아니 하나니, 정 가운데 혜를 구하지 말라. 급히 구하면 성정을 상함이요 성정을 상하면 혜가 없어지느니라. 마음 밝아지는 이치가 정 가운데 혜를 구하지 않아도 혜가 자연히 나나니, 이것을 일러 참 혜라고 이름 하느니라.
혜를 얻은 후에 혜가 있어도 쓰지 아니하며, 안으로는 지혜가 밝되 밖으로는 어리석은 것과 같이 하여 더욱 정과 혜를 온전히 하면 쌍으로 아름다움이 한량이 없으리라.
만일 정 가운데 생각과 생각이 많이 일어나면 뭇 사사가 정신을 요망하게 하며 일백 마취가 마음을 따라서 보는 바를 응하여 따르느니라.
세존과 제불 진인의 법을 이에 밝히노라. 학도자가 만일 마음을 붙잡아서 참 정이 된 마음으로 하여금 위로 활연(豁然)히 덮은 바가 없으며 아래로 광연(曠然)히 걸린 바가 없게 되면, 구업은 날로 사라지고 신업은 다시 짓지 아니하며 얽히고 얽힌 바가 없어서 진롱(塵籠)을 멀리 벗어나나니, 그리 되는 자는 행하기를 오래하면 자연히 도를 얻느니라.
대범 도를 얻는 사람이 무릇 일곱 가지 통함이 있으니,
첫째는 마음을 얻어 정을 본 후에 모든 진루(塵漏)를 깨친 것이요,
둘째는 이목구비로 행하는 병이 여러 가지로 몸에 얽히고 얽힘이 모두 다 사라짐에 몸과 마음이 가볍고 서늘함이요,
셋째는 위태하고 요손(夭損)한 법을 안보(安保)하여 평탄한데 돌아와 성명(性命)을 회복함이요,
넷째는 수(壽)를 일천 년에 연하였으니, 이름 하여 선인(仙人)이라 하며,
다섯째는 형체를 단련하여 기운을 만들었으니, 이름 하여 진인(眞人)이라 하며,
여섯째는 기운을 단련하여 귀신을 만들었으니, 이름 하여 신인(神人)이라 하며,
일곱째는 귀신을 단련하여 도에 합하였으니, 이름 하여 지인(至人)이라 하느니라.
공부하는 사람이 그 기틀을 보아 기운을 따라서 더욱 밝음을 얻고 도에 이르러 혜를 이루면 이에 두렷이 갖추느니라. 만일 이에 오래 배워 마음을 정하면 몸과 마음에 한 통(通 ; 착심)도 없어야 분명한 불인(佛人)이니라.
또는 공부하는 사람이 날과 해를 재촉하며 풍속을 떠나 부모처자를 이별하여야 도를 얻는다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혜각(慧覺)이라 하니, 실은 도를 구하는 이치가 처소는 고사하고 이상과 같은 해설을 열람한 후에 선인의 가르침만 어긋나게 않으면 도를 얻느니라.
제7장 명진상지도(明眞常之道)
세존이 말씀하시기를,“큰 도가 형상이 없으나 천지를 낳고 기르며, 큰 도가 정(情)이 없으나 일월을 운전해 행하며, 큰 도가 이름이 없으나 만물을 장양하느니라. 내가 그 이름을 알지 못하되 강연히 말하면 도라고 하노라.”하셨느니라.
대범 도의 행하는 것은 맑은 것도 있고 탁한 것도 있으며, 동한 것도 있고 정한 것도 있으니, 하늘은 맑고 땅은 탁하며 하늘은 동하고 땅은 정하며, 남자는 맑고 여자는 탁하며 남자는 동하고 여자는 정하나니, 근본이 내리고 끝이 흘러서 만물을 내는지라, 그러므로 맑은 것은 탁함의 근원이요 동하는 것은 정하는 바탕이라, 사람이 능히 도를 알아 항상 청정하면 천지가 이에 돌아오느니라.
대범 사람의 정신은 맑은 것을 좋아하되 마음이 들어서 흔들어 탁하게 하며, 사람의 마음이 고요한 것을 좋아하되 욕심이 들어서 운전해 요란하게 하나니, 항상 능히 그 욕심이 마음을 운전해가는 것을 없애고 보면 마음이 스스로 고요해지느니라.
그 마음을 맑히고 보면 정신이 스스로 맑아져서 자연히 여섯 욕심(안이비설신의 육근)이 나지 아니하여 세 독(탐진치 삼독)함이 소멸하나니, 능히 도를 얻지 못한 자는 마음을 맑히지 못하고 욕심을 멸하지 못한 연고라, 능히 욕심을 멸한 자는 안으로 그 마음을 봄에 마음이 그 마음이 없으며 밖으로 그 얼굴을 봄에 얼굴이 그 얼굴이 없으며 멀리 그 물건을 봄에 물건이 그 물건이 없나니, 이 세 가지를 이미 깨달으면 오직 공한 것만 보나니 공한 것을 보는 것 또한 공해서 공이 공이라고 한 바도 없어지며, 공이라고 한 바가 이미 없어지면 없다 하는 것도 또한 없어지며, 없다한 것이 이미 없고 보면 담연히 항상 적적해서 적적함이 적적한 바가 없어지면 욕심이 어찌 능히 생기리오.
욕심이 이미 생기지 아니하면 곧 이것이 참 진정(眞靜)이라, 참되고 떳떳하게 물건을 응하며 참되고 떳떳하게 성정을 얻어서 항상 응하여도 항상 고요하면 항상 청정하느니라.
이와 같이 청정하면 점점 참 도에 들어갈 것이요 점점 참 도에 들어가면 이름 하여 도를 얻었다고 하나니, 비록 도를 얻었다고 이름 하나 실상은 얻은 바가 없고 중생을 위해서 교화하는 것을 도를 얻었다고 이름 하나니, 이것을 능히 깨달은 자는 가히 성현의 도를 전하리라.
또 말씀하시기를,“상등 사람은 자타의 마음이 없으므로 다투고 다툼이 없으며 하등 사람은 자타의 마음이 있으므로 다투고 다투며, 상덕(上德)은 덕을 써도 덕이라는 상이 없으며 하덕(下德)은 덕을 쓰면 덕이라는 상에 집착하나니, 집착하는 자는 도라고 이름 하지 않느니라.
중생이 참 도를 얻지 못하는 것은 망령된 마음이 있는 연고이니, 이미 망령된 마음이 있으면 곧 정신이 놀라며 그 정신 이미 놀라면 곧 만물에 집착함이 있으며, 만물에 집착함이 있고 보면 곧 탐한 욕심이 나며 탐한 욕심이 나고 보면 이것이 번뇌라, 번뇌와 망상이 몸과 마음을 근심하게 하고 해롭게 해서 문득 탁하고 욕된 데에 만나게 해서 생사에 흐르고 고해에 항상 잠기어 길이 참 도를 잃어버리느니라. 참되고 떳떳한 도를 깨달은 자는 스스로 얻을 것이요 얻어 깨달은 자는 항상 청정 하느니라.”
대범 움직임이 있어서 동한 것이 동하지 아니한 데에서 나며, 함이 있어서 하는 것이 하지 않는 데에서 나나니, 하는 것이 없으면 귀신이 돌아가고 귀신이 돌아가면 만물이 적적하다고 이르며, 움직이지 아니하면 기운이 정하고 기운이 정하면 만물이 생함이 없나니, 귀신과 귀신이 서로 지키며 물건과 물건이 서로 바탕 해서 그 근원과 그 뿌리를 묵묵히 깨달음에 나를 스스로 알아서 무간(無間)한데 돌아가면 죽지고 않고 나지도 않아서 천지로부터 하나가 되느니라.
또는 눈에 보는 것을 잊어버리면 광명 넘침이 한량이 없으며, 귀에 듣는 것을 없애면 마음 지식이 항상 깊나니, 두 기틀을 한 가지로 잊어버려서 뭇 묘한 문에 떨쳐남에 순순(純純)하고 순순하며 온전하고 온전해서 만물과 산하대지에 합하며 원만하고 원만하며 밝고 밝아서 낱 없는 데에 합하면 천지에 큰 물건을 내가 벼루 줄잡은 바요 만물의 여러 가지를 내가 가진 바이니, 어찌 다하고 마침이 있어서 떨어지고 부족함을 말하리오.
또 그 상 없는 것을 기르는 것이 상이 짐짓 떳떳이 있는 것이요 그 체 없는 것을 간직하는 것이 체가 짐짓 온전히 참되는 것이라, 온전하고 참된 것이 서로 건네면 가히 장구(長久)하나니, 하늘이 그 참됨을 얻었으므로 길고 땅이 그 참됨을 얻었으므로 오래하고 사람이 그 참됨을 얻었으므로 수(壽)하나니, 세상 사람이 능히 장구(長久)하지 못한 것은 그 상 없는 것을 잃어버리며 그 체 없는 것을 흩어서 능히 백해(百骸)와 구규(九竅)로 하여금 참 체로 더불어 아울러 보존하지 못하므로 죽느니라.
또는 선인(先人)이 생(生)하되 생함이 얼굴이 없으며, 후천이 존(存)하되 존함이 체(體)가 없느니라. 그러나 체가 없고 보면 일찍이 있지를 않나니, 그러므로 가히 사의로써 생각하고 의논하지 못하느니라.
고요한 것이 성정이 됨에 마음이 그 가운데 있으며 움직인 것이 마음이 됨에 성정이 그 가운데 있으니, 마음이 생하면 성정이 멸하고 성정이 나타나면 마음이 멸하나니, 성정이 나타나면 허공과 같이 형상이 없어서 담연히 원만 하느니라.
큰 도가 형상이 없으므로 밖으로 그 마음이 나지 않아서 여여자연하고 넓어서 갓과 지음이 없으므로 경계를 대하여도 경계를 잊어버려서, 여섯 도적(盜賊)마(魔)에 잠기지 않으며 티끌에 거(居)해도 티끌을 벗어나서 일만 인연 화하는 데에 떨어지지 아니하여, 정(靜)한데 이르러 동하지 아니하며 화한데 이르러 옮기지 아니하면, 지혜가 시방에 비쳐서 허(虛)한 변화가 한량없으리라.
제8장 총명강요(總明綱要)
대범 수양 입정의 공부는 그 법이 하나가 아니니, 외수양법(外修養法)이 있고 내수양법(內修養法)이 있으며, 외정정법(外定靜法)이 있고 내정정법(內定靜法)이 있나니, 공부하는 사람은 능히 여러 법을 통관(洞觀)하여 방편에 맞게 쓴 후에 가히 결함 없는 것으로 시작하여 큰 성공을 얻을 것이니라.
또한 자성의 정과 소승의 정과 대승의 정이 있으니, 이에 역시 밝게 판단하여 잘 고찰한 후에 가히 그릇됨이 없는 것으로 시작하여 바른 정(定)을 얻으라. 이것이 이 수양의 도이니라. 이치가 법이 많으니, 말은 비록 다르나 뜻은 모두 같은 것이라 만약 그 강요를 잘 알지 못하면 집착에 빠질까 우려하노라. 편벽된 수행이 병통이므로 다시 이 책의 전편의 모든 뜻을 별도로 간단하게 밝힌 것이다.
외수양(外修養)이라고 하는 것은, 그 수양의 의지가 외경(外境)을 대치(對治)하는 데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외경을 대치한다는 것은,
첫째는 피경(避境)공부이니, 처음 공부를 할 때에 마땅히 밖에서 유혹하는 경계를 멀리 피해야 하는 것이요,
둘째는 사사(捨事)공부이니, 긴요하지 않은 일과 너무 번잡한 일은 마땅히 놓아버리고 짓지 말아야 하는 것이요,
셋째는 의법(依法)공부이니, 상승 해탈의 법을 믿어 받들어 진리로 안심을 구하는 것이요,
넷째는 다문(多聞)공부이니, 위인들의 관대한 실화를 많이 들어 항상 국량을 크게 하는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공부를 하여갈 즈음에 이 네 가지 일을 행하면 자연히 외경이 평정(平定)하여져서 방해하는 마음의 폐단이 없으리라.
옛 말에 이르기를,“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하였으니, 바람은 곧 외경이니라. 바람이 그친 즉 나무가 고요하고, 경계를 다스린즉 마음이 안정되는 것이니라.
내수양(內修養)이라고 하는 것은, 수양의 뜻이 안으로 닦아 쉬어버리는 데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안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닦는 것은,
첫째, 집심(執心)공부이니, 염불 좌선을 할 때와 일체의 때 가운데 항상 마음을 잘 붙잡아 동하지 아니하고 나의 마음과 정신으로 하여금 밖의 경계에 흐르지 않게 놓아버리지 않는 것이니, 소를 길들이는 사람이 고삐를 단단히 잡고 놓지 않은 것과 같으니라.
둘째, 관심(觀心)공부이니, 집심공부가 점차 익숙해지면 혹은 방임 자적(自適)하면서 다만 마음이 가는 것을 보아 그 망념만을 제재(制裁)하는 것이니, 마치 소를 길들이는 사람이 고삐를 놓고 소를 보되 다만 어지럽게 다니는 것을 제재하는 것과 같은 것이요,
셋째, 무심(無心)공부이니, 관심공부가 이미 순숙되면 혹은 본다는 상도 놓아서 서로 밝고 고요하게 자재함에 맡겨보는 것이니, 마치 소를 길들이는 사람이 사람과 소가 둘이 아닌 지경에 처음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동과 정이 한가지로 참되느니라.
경에 이르시기를,“마음이 청정(淸淨)하면 일체가 다 청정하여, 마음이란 것이 허공과 만상을 포함하였다.”고 하셨거니와, 한 마음이 청정하면 백 천 외경이 다 청정하여 경계와 내가 사이가 없이 한가지로 정토(淨土)를 이루리라.
외정정(外定靜)이라고 하는 것은, 정정(定靜)의 뜻이 입지(立志)가 흔들리지 아니한 데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입지가 부동하다는 것은,
첫째는 큰 서원을 발하는 것이니, 서원이 지극하면 천만 가지 세상의 인연이 앞에 가로 놓여 있어도 보되 보이지 않고 마음에 조금도 걸림이 없는 것이니, 마치 석가세존께서 대도에 발심하여 왕궁의 쾌락과 설산(雪山)의 고(苦)가 마음과 사상(思想)에 머물지 않음과 같은 것이요,
둘째는 큰 신심을 발하는 것이니, 신심이 지극하면 천만 세간의 법이 비록 분운(紛紜)한 곳에 아울러 처하여도 다시 사량과 취사하는 분별심이 없는 것이니, 마치 혜가(慧可)가 달마에게 한번 믿고 뜻을 결정하여 몸을 잊고 법을 구하는 사상과 같은 것이요,
셋째는 큰 분심을 발하는 것이니, 분심이 지극하면 천만 장애가 비록 포위 중첩하여도 두려워하고 물러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니, 마치 예수의 십이사도가 위험을 무릅쓰고 도를 지키며 죽어도 마지않는 사상과 같은 것이니라.
그러므로 공부를 할 즈음에 이 세 가지 사상이 있으면 자연히 입지가 태산 같아서 흔들림이 없으리라.(특별히 세존과 혜가와 십이사도를 드는 것은 다만 한 예를 들어 말한 것이고, 모든 성현들의 능히 도문에 들어간 것은 모두 다 이러한 심사(心思)이며, 또한 표현은 서로 다르지만 실행의 결과는 하나이며 근본 사상도 하나로 같으니라.)
내정정(內定靜)이라 하는 것은, 정정의 뜻이 안으로 마음에 요란함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첫째는 염불과 좌선을 할 때에나 또는 일체 일이 없을 때에 요란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요, 분별에 일어나는 때에 이르러 분별이 그쳐서 적요(寂寥)하게 한 생각도 없어서 맛도 잊고 형체도 잊어 일념을 기르는 것이요,
둘째는 행주 동작과 내지 일체 일이 있을 때에 그 뜻이 올발라서 비록 찰라 간이라도 망념이 동하지 않게 하는 것이니, 옛 성인이 말씀하신‘일직심一直心’이 이것이요,
셋째는 사상(四相)이 공하고 육진(六塵)이 몰록 정결하여 경계를 대하되 경계를 잊고 착도 없고 물듦도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이 마땅히 행하여도 행하는 바가 없고 동하여도 동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이것이니라.
그러므로 공부를 할 즈음에 이 세 가지 힘을 얻으면 자연히 마음 바다가 평정하여지고 번뇌가 영원히 끊어지느니라. 또는 밖에서 도를 구하는 자는 그자성이 원래 정(淨)하고 정혜(定慧) 인연을 알지 못하고 혹 삿된 생각으로 원을 일으키고 혹 기이한데 의지하여 법을 믿고 혹 밖으로 꾸미는 것으로써 도를 구하며, 안으로 닦지 아니하고 밖으로 신통에 마음을 두어 주문을 외고 명상에 고집 불변하여 오래오래 성숙(成熟)하면 또한 정의 도에 들어가기 어려우니라.
그러나 만약 정(定)을 닦는 가운데 이적이 조금이라도 나타나면 마음이 황홀(怳惚)하여지고 혜가 조금 발하면 더욱 번창하여 정(定)이 다시 요란해지고 또한 삿된 행동으로 죄를 짓는 자가 매우 많으니, 자성의 정은 먼저 자성이 원래 고요함을 알아 정혜인연으로 이에 의지하여 수행하면 공과 색이 둘이 아니고 동과 정이 하나이고 원망과 친함이 평등하고 선악의 성이 공하며 생로병사와 일체의 인과에 조금도 걸리고 막힘이 없이 여여 자연하여 망념을 영원히 멸하여 성품의 체가 항상 나타나나니, 비하건대 풀을 뽑는 사람이 풀의 뿌리를 제거하여 다시는 싹이 나지 않도록 하는 것과 같으니라.
소승의 정(定)은 독선적이어서 중생을 제도할 생각은 하지 않고 편벽되이 작은 법을 구하고 다만 무사안일만을 취하며 혹은 세속과 처자를 피해 산속으로 들어가 종신토록 보고 듣는 것이 없는 것으로 스스로 정결한 것을 삼으며, 혹은 경계를 피하고 홀로 처하여 종신토록 일 없이 지내며 이렇게 스스로 생각 생각이 부지런히 닦고 세속에 물들지 않으며 참 정을 이루고자 하지만, 그러나 만약 세속을 떠나 사물을 응하고 순역간의 모든 경계를 포위하고 공격하면 창황(愴惶) 간에 바름을 잃고 마나니, 비유하면 작은 그릇의 물을 비록 맑히고자 하나 도리어 오염시키는 격이니라.
대승의 정은 대도를 믿고 받들며 중생을 제도하기로 서원하여, 정을 시끄러운 데에서 익히고 고에서 편안함을 구하며 일이 있는 가운데에서 일 없음을 취하고 욕심 경계에서 무욕을 구하며 인욕 정진하여 화하되 흐르지 않는 데에 이르러, 희로애락과 사랑하고 미워함과 좋고 나쁨을 임의로 자재하여, 동하되 고요함을 떠나지 아니하고 정하되 동을 떠나지 아니하면 동과 정이 항상 편안하리니, 비유하여 말하면 대해의 물이 크고 넓어서 맑히고자 하나 맑힐 수 없고 탁하게 하고자 하나 탁하게 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라. 수도하는 사람은 능히 모든 법을 잘 이해하고 근기를 따라 밝게 통찰하여 매하지 않으면 수행하는 가운데 비록 미혹과 장애가 있더라도 벌어지지 않으리라.
이 책의 모든 편의 말씀을 종횡으로 흐르도록 통하여 비록 여러 가지 방편이 있으나, 그 본의는 다만 수양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라. 수양의 수(修)는 덕을 왕성하게 기르는 것이니라. 지혜와 총명은 이로 말미암아 기초가 되고, 솔성과 실행은 이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며, 신통과 묘술이 이로 말미암아 생기고, 생사 해탈이 이로 말미암아 얻어지고, 육도를 자유함도 이로 말미암아 근원이 되느니라. 대범 수행하는 사람은 부지런하고 또 부지런할 지어다.
정정요론(수심정경)에 대한 이해
정정요론(定靜要論)은 원기 12년 5월에 발간된 수양연구요론에 상하로 나뉘어 1장과 2장으로 수록된 내용이다. 수양연구요론은 원기 12년 3월에 불법연구회 규약이라는 최초의 교서가 나온 지 두 달 만에 발간된 것으로 소태산(少太山) 술(述)로 발간된 교단 최초의 활자본 교서이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그 서문에“본서는 가장 간명히 수양의 본원을 알리기 위하여 정정요론을 말하고, 연구의 방편을 밝히기 위하여 삼강령 팔조목과 각 문목순서 등을 설명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수양연구요론은 이공주(李共株)종사의 후원으로 출간되었는데, 이 책의 발간을 위해 대종사께서 직접 상경하여 친감(親鑑)하실 정도로 정성을 드렸으며, 교단 최초로 소태산 대종사의 30대 중반 삭발한 흰색 두루마리 차림의 모습을 사진으로 싣는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불법연구회 규약>과는 성격이 다른 실질적으로 최초의 교서이기 때문이다. 편집 겸 발행인 이경길(李瓊吉)은 이공주 종사의 호적명이다. 이름 가운데 경(瓊)은 옥, 또는 옥의 아름다운 빛깔이란 의미로, 법명의 구슬 주(珠) 자(字)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수양연구요론은 약 5년 동안 기본 교서역할을 하다가, 원기 17년(1932) 4월에 드디어 국한문 혼용체의 『보경 육대요령(寶經 六大要領)』이 발간되고, 한 달 뒤에 한글 전용 판이 나왔다.『보경 육대요령(寶經 六大要領)』이 발간 된지 2년 8개월 뒤인 원기 19년(1934) 12월에 이를 간추린『보경 삼대요령』이 발간되어, 두 교서는 대종사 열반 때 까지 교단의 중추적인 교리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수양연구요론에 술(述)이라는 단어는‘짓다’,‘글로 표현하다’,‘말하다’,‘설명하다’,‘해석하다’ 등의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경우처럼 술(述)을‘지음’이라는 개념으로만 파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정정요론은 비전(秘傳)의 선서(仙書)인 정심요결(正心要訣)을 해석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심요결은 정산(鼎山)종사께서 대종사를 만나기 전 18세(1917년) 때에 정읍 덕천면 신월리 두승산 시루봉 아래의 손바래기 마을에 있는 증산(甑山)의 본가(本家)에서 증산의 무남독녀 외딸인‘강순임’(당시 16세경)으로부터 입수한 책이다.
원래의 책명은『영보국 정정편(靈寶局定靜篇)』으로, 나중에 정산이 봉래산에서 대종사께 올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며, 증산교파의 하나인 삼덕교(三德敎)의 수련교서이다.『영보국 정정편(靈寶局定靜篇)』은 삼덕교의『생화정경(生化正經)』 부편에 실려 있는데, 이 책은 증산에 의해 이옥포(李玉圃)에게 전해졌고, 다시 이치복과 김형국에게 전해져서 보성 득량의 허욱(許昱)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이옥포는 부안 사람으로 선천 음양학술에 정통하였다고 한다. 허욱은 이 책을 읽고 7일 만에 통령(通靈)하여 삼덕교를 창설했다. 삼덕교는 나중에 단군정신선양회(檀君情神宣揚會)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미루어 보면, 일설(一說)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서(秘書)를 증산이 딸에게 비밀히 전하면서,“이 책은 나중에 주인이 나타날 것이니, 잘 보관하였다가 그 사람이 나타나면 내어 주라,”고 하여, 딸 순임이가 이를 깊숙이 보관하였다가, 정산이 18세 무렵에 찾아와 머무르는 동안 오빠처럼 따르며 살펴보니,‘바로 이 분이 아버님이 말씀하신 그 분’이라는 확신을 얻어 정산에게 주었다는 설은 신빙성이 떨어져 보인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미 여러 사람들에게 전하여 졌고, 삼덕교에서 이를 수련교서로 삼았기 때문이다.
『정정요론』의 저본은 정산종사의 외사촌인 훈산 이춘풍이 순 한문으로 된『정심요결』을 번역한『정심요결 번역』본이다.『정심요결』은『영보국 정정편』과『도설(道說) 상중하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도설(道說)은 정통도장(正統道藏)의 내단수련서(內丹修練書)『정관경(定觀經)』,『상청정경(上淸定經)』,『통고경(通古經)』,『대통경(大通經)』 등 여러 경서(經書)를 합편한 것이다.
이러한 정정요론은 대종사 봉래산 수양 시 부터 제자들에게 회람되면서 보급되다가, 원기 12년에 <수양연구요론>에 번역본이 보입(補入)되면서 정식으로 교서로 자리매김하였다. 수심정경(修心正經)은 바로 정정요론을 정산종사가 보완 증편한 것으로, 중앙선원에서 원기 39년(1954) 동선(冬禪) 때에 순 한문으로 발간하여 교무들과 선학원생들의 교재로 활용했다. 본래는 편장(篇章)의 구분이 없던 것을 정산종사가 이를 부분적으로 가감 보완하면서 7장으로 정리하였고, 마지막 제8장 총명강요(總明綱要)는 정산종사가 새로 지어 붙인 것이다.
제8장 총명강요는 앞의 7장까지의 내용에 대한 총체적인 결론 부분으로 이해하면 되며, 구체적인 수행의 방법을 강령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정정요론을 완결한 의의를 갖는다. 제8장 총명강요의 내용은『정산종사법어』제6 경의편(經義篇) 65장과 66장에 부분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대략 수심정경의 강령으로써 외수양(外修養)과 내수양(內修養)을 밝히고, 외수양(外修養) 공부법으로 ①피경(避境)공부 ②사사(捨事)공부 ③의법(依法)공부 ④다문(多聞)공부 네 가지를 밝혔고, 내수양(內修養) 공부법으로 ①집심(執心)공부 ②관심(觀心)공부 ③무심(無心)공부 이 세 가지를 밝혔다.(경의편 65장)
또한 외정정(外定靜)과 내정정(內定靜)을 밝히고, 외정정(外定靜) 공부법으로 ①큰 원(願)을 발함. ②큰 신심을 발함. ③큰 분심(忿心)을 발함. 이 세 가지를 밝히고, 내정정(內定靜) 공부법으로 또한 세 가지 방법을 자상히 밝혔다.(경의편 66장) 따라서 이 책의 내용은 엄밀히 말하면 정정요론과 수심정경을 합본한 것이다.
정정요론은 이렇게 초기 교단의 교리 형성에 영향을 미쳐, 삼학 수행은 물론, 신.분.의.성과 불.신.탐욕.나.우 등 팔조(八條)와, 좌선법, 그리고 일부 내용은 참회문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이 인용되었다.
<참고문헌>
『원불교 초기교서』, 원불교 자료실편, 원광대학교 중앙도서관, 총장 송천은 발행 同원불교 자료실 박용덕지음, 원광대학교 출판국, 1997.
『원불교 전서』정산종사법어, 원불교 정화사 편찬, 원불교 출판사, 1977.
『원불교 교고총간』(영인본) 초기교서편, 원불교 출판사, 1994.
"이와 같은 사실을 미루어 보면, 일설(一說)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서(秘書)를 증산이 딸에게 비밀히 전하면서,“이 책은 나중에 주인이 나타날 것이니, 잘 보관하였다가 그 사람이 나타나면 내어 주라,”고 하여, 딸 순임이가 이를 깊숙이 보관하였다가, 정산이 18세 무렵에 찾아와 머무르는 동안 오빠처럼 따르며 살펴보니,‘바로 이 분이 아버님이 말씀하신 그 분’이라는 확신을 얻어 정산에게 주었다는 설은 신빙성이 떨어져 보인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미 여러 사람들에게 전하여 졌고, 삼덕교에서 이를 수련교서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올바른 내용 같습니다. 아마도 원불교에서 증산계열 수련법을 차용하는데 무슨 명분이 있어야 하니, 비서 이야기가 나온것 같습니다.
이것이 올바른 내용 같습니다. 아마도 원불교에서 증산계열 수련법을 차용하는데 무슨 명분이 있어야 하니, 비서 이야기가 나온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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