定靜要論 底本 『정심요결』 입수 과정
朴龍德
소년도인, 허령에 잡힌고부인 기운 눌러
고향에서 백일 치성을 마치고 송도군은 산골 논 서 마지기 판 돈을 가지고 선돌댁과 같이 다시 전라도로 왔다. 도를 이루지 않고는 결코 집에 돌아가지 않으리라 각심한 그는 실상 1917년 음력 9월의 두번째 전라도 행으로 고향과 영 이별이 되었다(정산종사는 전라도 각지에 구도 편력하고 대종사 문하에 들어 대업을 이룬 뒤 한번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도군이 선돌댁과 같이 다시 전라도로 와 머문 곳은 정읍 두승산 시루봉(甑山) 아래 마을 손바래기였다. 석달 전에 손(客)으로 얼마동안 머물렀던 곳이라 증산의 가족들은 매우 반갑게 맞이하였다.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에 소재한 이 마을은 「손바래기」 또는 「새터」라고도 부르는데 속설에 의하면 손님을 바라기(客望) 위해 시루봉 아래 새터를 잡았다고 한다. 新月里 新基라면 「새 터를 잡고 새 달(손님)을 기다린다」는 뜻이 되고 마는데, 어찌된 기연인지 얼마 뒤 도군은 모악산 대원사에서 수련 도중 증산교 신도들로부터 달덩이 같은 용모의 새 손님 「만국양반」으로 받들어져, 손바래기에서 불과 십리 상거한 덕천들 건너 화해리 마동에 7개월간 머물게 되고, 또 증산의 유족들도 집안의 불미한 일로 그곳(화해리)에 옮겨가 한 동네에 살게 된다.
최초교서 『수양연구요론』과 『정심요결번역』本. 훈산 이춘풍의 「정심요결」 번역본은 『수양연구요론』(정정요론)의 草本이 되었다.
송도군은 손바래기와 원평 송찬오의 엿방을 거점으로 정읍, 김제, 고창, 장성 등지의 이름 난 도꾼들을 찾아 다녔다. 고부인을 만난 것은 이 무렵이다. 차경석이 신도들을 단합하여 조선 독립을 도모함과 아울러 황제되기를 획책한다는 혐의로 수차 일 헌병의 수사를 받게 되자, 이 해 가을 그들의 감시망을 피해 유랑의 길을 떠나 강원도, 경상도 등지에서 핍박받는 민심의 호응을 얻어 엄청난 신도를 확보하게 된다.
송도군은 큰 기대를 가지고 고부인을 만나러 다시 대흥리에 가서 얼마동안 머물렀다. 고부인은 도를 구하러 온 소년의 진지한 자세에 몹시 부담을 느낀 듯하다. 마침 아들을 찾아 전라도에 온 송인기(久山 宋碧照)에게 고부인은 간곡한 부탁을 한다.
『지발 댁의 아들 좀 데리고 가소. 내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당췌 못 살겠소』
이에 대해 도군의 아내 여청운은 이렇게 보았다. 「시아버님께서 전라도에 와서 고씨 부인을 만나, 아들을 데려 가라는 부탁을 받는데」 그것은 새파란 소년 도인이 「고부인의 허령을 누르니까 싫어서 내치는 것」이라는 것이다.
송도군은 스승을 찾아 각처로 편력하였지만 모두 기대함만 같지 못하였다. 다만 손바래기에서 증산 유일의 혈손인 강순임으로부터 秘書(비서)를 입수한 것이 큰 소득이었다.
『정심요결』 入手
시루봉 손바래기에 있을 때 선돌댁과 강순임이 도군에 대한 敬愛(경애)가 대단하여, 선돌댁은 그를 「조카」라 불렀고 네살 아래인 순임은 「오빠」라 불렀다.
집안이 매우 조용한 어느날, 순임이 다가와 정답게 말을 걸었다.
『오빠, 내가 좋은 것 하나 일러 줄까』
『무슨 일인데. 이야기 해 봐라』
『옛날 선친께서 서재같이 쓰신 별실이 있는데 그리 가 보아요』 하고 별실로 인도하여, 묵은 종이로 땜질하듯 봉해놓은 천정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선친께서 저기에 책 한 권을 넣고 봉하시면서 뒷날 여기를 열고 찾아갈 사람이 있을 터이니 주인이 올 때까지는 입밖에 말을 내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하시었으니 오빠가 뜯어보면 좋겠소』(이상 정산종사의 시자로 있었던 범산님의 이야기).
일구월심 도 구하기에만 전념하는 때, 증산이 후일 어떤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 책을 숨겨 두었다면 이는 필시 보통 비서가 아닐 것이라는 기대 속에, 도군은 순임의 등을 밟고 올라서서 천정을 뜯었다(이 부분은 항타원님 이야기임).
빛 바랜 백지에 보통 정도 필체(붓글씨)의 순한문책인데 표지에 「正心要訣」이라 제목하였다. 정심요결 필자는 확실치 않다. 책의 말미에 「道門小子玉圃는 敢發天師之秘하야 記述定靜一部하노니」(도문 소자 옥포는 삼가 천사의 비서를 발하야 정정 한 책을 지어 기록할 것이니)라고 한 구절로 미루어 「옥포」라는 호를 가진 도학자가 기술한 것만은 분명하다.
송도군, 증산의 무남독녀 강순임으로부터 비서 『정심요결』 입수하고 바로 대원사에 들어가
5종 仙書 번역하여 최초 교서 『수양연구요론』 간행, 정산종사 『수심정경』으로 수정 보완해
주인을 기다리던 서책을 입수한 송도군은 그 내용을 살펴보고 어찌나 황홀하고 즐거운지 그 기쁨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소중한 비서인지라 말이 아니 나야 하겠으므로 도군은 순임에게 단단히 당부하였다.
『내가 여기 뜯어 본 것을 사람들이 알아도 안 되고, 또 이 책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도 남이 알아서도 아니 되니 우리 이 일을 절대 발설하지 말자』
굳게 약속을 하고 품속에 간직하고 다니면서 혼자서 잠자기 전이나 일찍 잠에서 깨었을 적에 읽어보곤 하였다.
『정심요결』의 出處와 流行
『정심요결』이란 서명은 1970년 9월, 정화사(사무장 이공전)에서 『원불교 교고총간』 4권-초기교서편을 발간할 때 『修心正經(수심정경)』의 底本(저본)임을 밝히게 되면서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학인들 사이에 『수심정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이를 수양교재로 혹은 연구 대상으로 삼는 일이 늘어났다.
「영보국정정편」(정심요결)이 수록된삼덕교의 『생화정경』
1991년 1월, 필자에 의해 훈산의 『정심요결 번역』본이 발굴되었으나 그 번역본의 대상이 되어야 할 「순한문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다.
근자에 이르러 수심정경 총 8장 중 1~5장에 해당되는 〈靈寶局定靜編〉(영보국정정편)이라는 수련서가 三德敎(현 단군정신선양회) 교서 『生化正經』의 부편으로 실려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母本이 宋末元初의 정소남(鄭所南, 1241~1318)의 『太極祭鍊內法議略(태극제련내법의략)』을 발췌하여 구성된 것이며, 南宋의 靈寶派(영보파) 수련법이 구한말에 유입되어 암암리에 유행되었음을 논하는 글이 금년 2월 『정산사상의 현대적 조명』이란 주제로 열린 제17회 원불교사상연구학술대회에 소개되었다(안동준, 수심정경의 연원에 대하여, 109~110쪽, 1998.2). 『태극제련내법의략』은 본디 祭鍊魂魄(제련혼백)을 지향하는 鍊度(연도) 수련서이다. 이옥포는 연도에 관련된 장황한 부분을 대폭 축약하고 『중용』의 至誠을 서두에 내세워(夫定靜之法 懷至廣至大之願 發至誠至信之心) 率性明德하는 새로운 수련 법문으로 개편하여 『영보국정정편』으로 명명한 것이다.
李玉圃는 부안 사람으로 1900년대 초까지 살았던 음양 학술에 정통한 도학자이다.
그의 문하에 이치복과 김형국이 있었는데 옥포는 두 제자에게 당부하였다.
『그대들이 事師할 선생은 장차 出世할 姜聖人이요 나는 그대들의 指路者에 불과하다』
강순임의 진영.증산은 무남독녀 순임에게 뒷날 이 책 주인이 올 것이라며 「정심요결」을 주었다.
옥포는 「자기는 길 안내를 하는 사람」이라며 두 사람에게 증산을 찾아가 배우라고 하고, 그가 지은 〈…정정편〉을 주며 읽고 정성껏 수련하라고 일렀다(『生化正經』 2쪽). 옥포는 일찍이 증산의 기국을 알아 보았고 증산이 31세때 大院寺에서 도통을 하던 1901년 무렵에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4년(甲寅) 이치복과 김형국은 〈…정정편〉에 의거하여 보성 득량 사람 허욱을 지도하였다. 허욱이 수련한지 7일만에 통령하자, 김형국이 찬탄하여 말하였다.
『우리들 3년 공부를 그대는 7일만에 닦아서 득도하니 도 공부를 하는데는 早晩(조만)이 없도다』
〈영보국정정편〉이 삼덕교의 수련 교서가 된 것은 교주 許昱(허욱)이 그로 인해 통령하였기 때문이다.
이옥포가 재편성한 「영보국정정편」이 강증산에게 전수되어 그가 대원사에서 도통하였으리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道를 通함은時間에 구애받을 수 없어
증산이 25세되던 을미년 봄에 고부지방 유생들이 동학농민운동이 평란되었음을 축하하는 뜻으로 두승산에 모여 詩會를 열 때 한 노인이 증산을 조용한 곳으로 청하여 작은 책 한권을 전하였다고 한다(『대순전경』 1~24). 그 책을 준 노인이 이옥포인지 확인할 수는 없으나, 아무튼 이로부터 6년 뒤 증산은 모악산 대원사에서 수도하여 21일만에 도통하였다. 증산이 매양 제자들에게 胎坐法(태좌법)으로 늘여 앉히고 조금도 움직이지 마라며 몸을 요동치 못하게 하고 잡념을 떼고 正心토록(『보천교지』 천사편 2장 61절) 하는 가르침을 베풀었다는데 태을주 수련 외에도 다른 정좌 수련법이 전해진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를 「…정정편」과 관련지어 짐작할 수 있다.
우리 도꾼들이 주목되는 대목은 〈정정편〉의 끝 부분의 「날을 한정한 공부」(剋日之限期)를 극절히 수련하면 3일 내지 7일 안에 靈寶(영보) 참 비결을 터득할 수 있다는 구절이다.
剋日之限期 大限은 三日이요 中限은 五日이요 下限은 七日也라 至道之下에 剋日何晩고 曰半時之內에 正覺圓性하면 限期遠也아(영보국정정편)
「날을 한정한 기한이 큰 기한은 삼일이요, 가운데 기한은 오일이요, 아래 기한은 칠일이니 지극한 도 아래 날 한정이 어찌 늦은고. 갈아대 반 시각내에 정히 두렷한 성품을 깨달으니 정한 기한이 멀다 하난야」(훈산 정심요결번역).
도를 구함이 지극할 때 그 기간이 어찌 더딜 것인가. 도 그 자체가 되어 그 가운데 서 있다면 아무리 못해도 7일, 아니 3일만에, 또는 지금 당장 반시간내에도 도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체 이 극절한 수행법에 매료 당하지 않을 자 그 누구이랴. 그래서 증산은 비서를 입수한지 6년만에 그동안 공들였던 천문, 의학, 역학 등 온갖 잡술에 탕진한 세월에 허망함을 느껴 일체를 다 놔버리고 대원사에 들어간지 세 이레만에 도통하였으며, 허욱은 정정 수련을 한지 7일만에 득도하였다. 미상불 손바래기에서 비서를 입수한 도군이 이에 고무되어 일찍이 진묵대사가 득도하고 증산이 도통한 대원사로 발걸음을 재촉하였을 법하다.
도통이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迷悟(미오)의 차이는 제 업장의 가짐과 안 가짐의 차이일 뿐이다. 정정이란 무엇인가. 일체 망념이 죽어버려 고요해졌다는 말이다. 내가 세상에 나서 가졌던 물질, 비물질의 모든 상념체를 다 놔 버렸을 때, 이 몸의 세포 속속들이 밴 業習(업습)을 일체 청산하였을 때 비로소 큰 깨달음이 온다.
정정편→정심요결→정정요론→수심정경
후일 정산종사는 부안 봉래정사에서 교법 초안을 도울 때 『정심요결』(영보국정정편)을 스승께 바쳤다. 대종사는 이 책에다 4종의 仙書(定觀經, 常淸淨經, 通古經, 大通經)를 더해 훈산 이춘풍에게 번역토록 하여 〈定靜要論〉(정정요론)이라 제목을 붙여 1927년 『修養硏究要論』(수양연구요론)이라는 번역교재를 간행하니 이것이 원불교 최초의 교서가 되었다.
해방이 되자, 일제의 식민지하에 움츠러들었던 민족의 정기는 물밀 듯 쏟아지는 좌우 사조의 급류에 휘말리고, 우후 죽순처럼 솟아 오르는,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기운을 감당하지 못해 6·25 동란의 피비린내 나는 동족 상잔의 회오리를 겪는다. 그러한 전후 혼란한 와중에 열린 교무선(講習) 교재로 정산종사는 번역문 〈정정요론〉의 산만한 서술을 대폭 수정 보완한 漢書 『修心正經』(1954)을 배포하여 주체를 잃고 어지러운 세상의 정신을 定靜하도록 修心하는 바른 공부를 강조하였다.
〈교무, 원광대 중앙도서관 원불교자료실〉